난민구호

북한에서 굶주림과 차별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북한 동포가 수만 명에 달합니다. 그 중 운이 좋은 사람만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대부분은 타국을 떠돌고 있는 북한 난민은 그 누구의 보살핌도 없는, 처참하고 딱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주민은 대부분 북한과 중국의 북쪽 경계를 가로지르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탈출합니다. 중국은 북한주민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불법경제이주자로 간주하여, 북한난민은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에 북한난민, 특히 여성과 아동이 인신매매당하거나 각종 범죄에 노출되어 처참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북한난민들이 체포되고 강제 송환되어 북한에서 감옥생활과 고문의 희생자가 되고 있거나 또는 중국에서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힘들고 불안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은 1996년 창립 이래 북한난민 구호 사업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갈 곳 없는 북한난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동남아시아 등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안전한 길로 이끌며, 중국에 숨어있는 북한난민에게 음식, 의약품, 옷가지 등을 제공하는 구호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에 강제송환이 될 경우 목숨이 위태로운 북한난민, 도움이 필요한 여성, 어린이를 최우선적으로 구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난민의 인권을 증진하기 위해 모니터링(monitoring)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으로 송환될 가능성이 있거나 생명에 위협을 받는 북한난민들의 상황을 국내외 언론에 알리고, 유엔난민기구(UNHCR), 외국 정부, 한국정부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북한난민들이 체포, 강제 송환되어 감옥생활과 고문의 희생자가 되고 있거나 또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힘들고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중국이나 동남아를 떠도는 북한난민의 80퍼센트가 여성과 어린이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인신매매나 착취의 희생자가 되거나, 무국적 신분으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절절한 외침은 오늘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섯 번이나 팔려 다녔습니다.”
“삶에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를 살려 주세요!"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지금까지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절박한 도움 요청이 있을 경우 수시로 모금을 통해 지원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북한난민이 겪는 인권침해의 심각함과 수시로 벌어지는 북한과 중국 공안의 강화된 단속을 생각할 때, 북한 난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도움의 손길을 마련하고자 2010년 1월 북한난민구호사업단을 결성하여 남한주민 한 사람이, 북한난민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희망 나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한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기금은 200~300만원입니다.
구호기금 계좌
우리은행 142-097009-01-201
국민은행 533301-01-050592
예금주 북한인권시민연합

[긴급] 14명의 북한난민이 같은 하늘 아래서 편안히 숨 쉴 수 있도록 도움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8-08-25 16:34:04
조회수 :
1138

 

길고 긴 폭염으로 태풍이 기다려진 때가 있었는지요? 

기다린 태풍이지만, 엄청난 비, 바람을 몰고 온 태풍으로 대지의 열기는 가라앉았지만, 

비와 바람으로 인한 피해가 이곳저곳에서 들립니다. 피해가 적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중국과 동남아에도 물난리로 인해 북한난민의 이동에도 어려움이 많아 걱정입니다. 

 

지난 8월 14일 11명의 북한난민을 무사히 구출해 감사서신을 올린 다음날부터 

북한난민의 구조요청이 쇄도해 숨을 고르자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아동, 청소년이 포함된 14명의 북한난민입니다.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분들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엄마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별의별일을 다하며 사신 분들입니다. 한 분은 도둑질도 했다고 합니다. 

모성은 강합니다. 자식을 위해 못할 일이 없는 것이지요. 

이들의 사연을 올립니다. 

 

 

# 인숙, 50대 여성, 함경북도

나는 학교 졸업하고 직장에서 일을 해 번 돈을 가지고 집에 가다가 소매치기 당해 

기차역에서 한심하게 있는데, 어떤 남자가 표를 끊어 줄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사람 말을 믿고 그길로 따라 나서 중국에 와보니 속은 것이었습니다. 

남자는 돈 받고 없어졌고 나는 차를 타고 점점 더 멀리 이동했습니다. 

시집이라고 간곳은 가난한 시골마을 남자였고, 정말 힘들게 살았습니다. 

항상 엄마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타락 하지 않게 했습니다. 

곧바로 아들이 태어났고, 중국말도 조금씩 알아가며 열심히 살고 일도 잘하니까 

이웃집에서 배 아파서 공안에 신고해 아이가 세 살 때 공안국에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와 무릎 꿇고 빌었고, 아이도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울었습니다. 

우리가족이 생이별하던 장면에 공안들은 웃으면서 조선으로 가야한다고 매정히 나를 

북송시켜 신의주 구류장에서 1년을 있었습니다.  오직 딸 생각에 잘 버티고 살아남아 

막상 그렇게 엄마한테 왔는데 자식생각과 조국에 대한 배신감에 조선이 너무나 싫어 

다시 강을 넘었는데 인신매매단에 걸려서 팔려갔습니다. 

그 집에서 도망쳐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감시가 심해 기회를 노리고 살다가 

다시 공안에 체포되어 북송되어 4년을 판결 받고 청진시 송평구역에 있는 감옥에서 

매 맞고 결핵에 걸려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4년을 견뎠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아들 찾아 병든 몸으로 다시 탈북해 남편에게 돌아갔고, 딸은 아홉 살이 되었습니다. 

다시 가족이 합쳐 좋기도 했지만 가난과 조선에서 구류장에서 맞아 몸이 아팠습니다. 

조선여자들 도와주셔서 진짜 고맙습니다.

 

 

# 송화영, 40대 여성, 함경북도

조선에서 죽도 못 먹을 정도였고, 아이가 죽을 지경이 되어도 돈이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아이를 맞기고 중국에 잠시 돈 벌러 나왔는데 속여 팔려갔습니다. 

중국 가난한 남자에게 팔려 살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 강제 북송되어 조선 감옥에 

2년 있다가 풀려나 남편에게 갔는데 도저히 가난해서 죽을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감옥에서 병을 만나서 약을 먹어야하는데 돈을 빌릴 곳도 없었고, 남편은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딸도 나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중국에 일한다고 왔는데 

인신매매하는 사람에게 속여서 또 팔려 시집갔습니다. 남자가 괴팍해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고 주먹질이 다반사여서 얼굴에 멍이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너무 때리고 천대해서 조선에 가는 게 났다고 생각하고 시엄마에게 대들었는데 

가족들 중 누가 공안에 신고해서 조선에 잡혀나가 또 2년을 감옥에 있으면서 

죽다가 살았습니다. 면회 온 엄마에게서 아버지는 죽고 딸 소식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가족이 보고 싶었는데 볼 수 없는 조선에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감옥에서 나와 

그길로 탈북했는데 다시 팔려갔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조선에 가는 게 났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공안에 찾아갔고, 북송되어 또 감옥에서 1년을 살고 다시 중국으로 탈북해 

팔려가서 아이 둘 낳고 살았습니다. 꼭 도와주세요.  

 

 

# 모녀(50대 엄마, 10대 청소년-여), 함경남도 

조선에서 어떻케든 잘 살아보려고 밀수품들을 가져와 되거리 하는 장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운전수가 물건을 싣고 도망쳐서 사람들에게 물건 값을 물어야 될 처지여서 

도망친 운전수를 잡았는데 내일 준다, 모래 준다, 미루다 중국에 있는 친척이 

직접 와서 돈 가져가라고 한다고 하면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는 도강이 뭔지도 중국에 가서 산다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렇게 돈 받으려고 2005년 첨벙첨벙 물을 건넜는데... 그 곳이 중국인지도 몰랐습니다. 

아침이 되니 다시 차타고 연길로 가야 된다고 해서 따라 왔는데 오자마자 한족들이 몰려와 

때리고 나를 망쳐놨습니다.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시키는 대로 했는데 팔려 시집갔습니다.

시집가서보니 내가 조선에서 임신해온 겁니다. 그 아이가 지금 데리고 나온 딸입니다. 

중국남자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았고 지금 여섯 살입니다. 

내 처지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막상  판단하지 못할 정도였지만 

꼭 살아야 조선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입술을 깨물며 울고 참고 버티다 

신경병으로 약을 먹어야 잠잘 수 있었는데 합병증까지 생겼습니다. 

조선 사람은 중국에서 신분증도 없고 말도 힘들고 아파도 병원도 못가는 신세입니다. 

제가 잘못한 결정을 하고 남편과 어린아이 둘을 버린 비정한 엄마라고 욕해도 됩니다. 

지금은 나는 아무생각도 없습니다. 혼자 살기도 지쳤습니다. 

 

 

# 모자(40대 엄마, 7세 남아), 함경북도        

조선에서 부모님 모시고 내가 부양해야하니 농사지으며 너무 힘들게 살았습니다.  

뒤늦게 무산 남자 만나서 결혼하고 중국소식을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시집와서도 살기가 힘들었고 아이가 없어서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돈을 많이 벌어 조선으로 돌아가 잘 살려고 2007년 두만강을 건넜는데.... 

팔려 중국 농촌 남자에게 시집가 후회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태어나 잘 살다 아이가 세 살 때 남편이 갑자기 병으로 죽었습니다. 

주변에서 혼자 사는 조선여자라고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집을 나와서 아파트 짓는 곳을 따라 다니면서 돈을 벌어 딸 키우면서 살았는데 

신분증검사에 일을 못하는 날이 더 많아 사는 것이 힘들게 되었고, 더구나 딸이 

호구가 없어서 학교에 다니기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에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년을 준비해서 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습니다. 

 

 

# 모녀(40대 엄마, 10대 청소년-여), 함경북도 

재가 살던 곳은 조선에서 제일 가난한 곳일 겁니다. 어느 날 남편이 말없이 사라져 

조사받고 감시받으며 살았습니다. 시어머니 모시고 아들 둘 키우기가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도둑질도 해보았습니다. 아이들은 잘 먹이지 못했어도 잘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에게서 소식이 왔는데 한국이라면서, 중국에 선을 놨으니 시어머니와 

아이 둘을 먼저 보내고는 소식이 없었습니다. 

혼자는 살 수가 없어 그해 12월에 가족을 찾으러 무조건 도강했습니다. 

중국만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두 달을 남편을 찾으려고 일하다 

우울증이 오자 나를 농사짓는 사람에게 팔아버렸습니다. 

중국에서 겪은 마음고생은 조선보다 더했습니다. 눈만 뜨면 일만했고, 

조선 가족들 생각과 남편에 대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나도 한국 가서 잘 살고 싶은 마음에 하루를 견디며 살다 딸아이를 데리고 도망쳤습니다. 

한국 가는 길이 목숨을 건 길이라고 합니다. 정말 두렵습니다.

              


# 추희숙, 30대 여성, 함경북도 

남편은 광산에 다녔는데 무능력해서 아들하나 옷도 제대로 못 입힐 정도였습니다. 

남편은 돈이 조금생기면 술 먹고 나를 때리고 바람 펴서 이혼한 것처럼 살았습니다. 

아이를 데리고 엄마네서 살다가 장사밑천 만들려고2009년 여름 중국에 나왔는데 

팔려서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내가 중국에 시집와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아이 낳고 집에 밥하고 일하고 빨래하고, 4년이 지나서야 밖을 조금씩 다니게 했습니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중국에 살 수 있는 사람도 못되어서 

공안이 신분증 검사라도 나오면 뒷문 열고 뛰기 바빴습니다. 

아들이 스스로 학교 다닐 수 있을 때까지 키우고 도망친다고 다짐 또 다짐하고 살았습니다. 

이제 아이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어 도망쳐 나왔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살아도 천대받는다는 것이 억울했는데... 

나중에 호구를 가지고 무시당했던 중국 사람들에게 당당히 대하고 싶습니다. 

 

 

# 금순, 30대 여성, 함경북도

엄마는 내가 11살 때 폐병으로 죽고 아버지와 오빠는 사고로 죽었습니다. 

언니와 둘이살다 언니가 돈 번다고 중국으로 간 다음 혼자 살았습니다. 

동무가 찾아와서 내 언니가 중국에서 사는 곳을 알았다고해서 안내자 따라 

2007년 12월 추운 겨울에 도강했습니다. 차타고 멀미하면서 힘들어도 

언니를 만난다는 생각에 힘든 줄도 모르고, 언니가 살고 있다는 곳에 

도착해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산 남자는 내가 보는데서 

삼만 위안을 주면서 나를 산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내 또래 여자들 세 명이 함께 강을 넘었는데 나같이 팔려갔다 생각하니 불쌍합니다. 

조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팔려가 아이를 낳아 지금 8살입니다. 

내가 아이를 낳고부터 남편이 무시하는 게 너무 힘들어 무작정 도망쳐 나왔지만 다시 

농촌으로 시집가 말 못하는 소처럼 일만했고 남편은 바람을 폈고 나를 천대했습니다. 

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밭에 나가서 혼자 조선말하고 다니다 남편에게 걸려서 

정신병자라고 매도 맞았지만 조선말 혼자 할 때가 좋았습니다. 

 

 

# 진윤희, 30대 여성, 평양    

평양에서 살다 아버지의 사고로 산골로 추방되어, 내게는 낯설고 친구도 없는 곳이고, 

아버지와 엄마는 힘드셨고, 집안형편도 어려웠습니다. 

나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살만하니 남편이 차사고로 갑자기 죽었습니다. 

혼자 어린 아이를 키울 힘이 없어 장사해 살아보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빚만 지게 되어 어린 아들을 고모에게 맞기고 동무를 통해 사람을 소개받아 

중국에서 돈벌어 엄마병도 고치고 장사도 해 보려고 사람들을 통해 2013년 도강했습니다. 

나올 때는 중국에 가는 사람들 많아서 돈 벌어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팔려서 농촌으로 시집갔습니다. 남편은 나를 소같이 부리면서 일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해도 돈을 십 원 이상을 주질 않았고, 도망칠까봐 내 근처를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조선에 두고 온 아들 생각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5년간 살면서 도망칠 궁리만했습니다. 

우리 같은 신세는 잡혀 가면 감옥에 가야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 반옥청, 40대 여성, 함경북도 

탄광에서 일했는데 월급대신 탄을 주면 그것을 팔아 먹을 것 걱정하는 가난 집이였습니다.

동무가 중국가면 돈벌 수 있다고 해서 부모님께 말도 하지 않고 1999년 나왔는데 

곧바로 팔려 나보다 나이가 9살 많은 남자와 살게 되었고 아이도 낳아 지금 18살입니다.

가난은 참을 수 있지만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나를 애가 보는 앞에서 때렸습니다. 

십년 동안 문밖을 나가지 못하게 해 시장에 가본 적이 없고, 이곳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조선여자들 불쌍합니다. 내 인생을  찾으려고 도망쳐 나왔지만 무섭고 두렵습니다. 

 

 

# 기경희, 30대 여성, 함경북도 

아버지는 어릴 때 돌아가셨고, 엄마가 우리 형제 셋을 키우다가 큰아이는 영양실조로 죽고 

아주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조선하면 생각나는 일은 굶었던 것... 

너무 배고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학교도 다니지 못해 글도 잘 몰랐습니다. 

엄마가 아파서 내가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나이는 어리지, 돈 번다고 돌아다닐 때, 

친구에게 속은 것입니다. 일하러 중국 가는 사람이 다섯 명이나 기다리는 겁니다. 

엄마에게 말도 못하고 세달 만 일해 돈벌어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2003년에 떠났습니다. 

강을 넘어 삼일을 기차타고 갔습니다. 큰 돈버는 곳은 멀리 있는 줄 알고 그냥 따라 갔는데

팔려 열두 살 많은 남자에게 시집간 것입니다. 울어도 소용없어서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리움과 죽이고 싶은 사람들 생각으로 2년을 보냈습니다.

아이 둘을 낳고 살았지만 남편은 나를 조금도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신분증 없어서 다닐 수 없고 숨어사는 신세가 제일 창피하고 힘들었습니다. 

 

 

# 류심성, 30대 여성, 강원도      

내가 사는 곳은 중국사정을 전혀 몰랐고, 탈북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친구가 좋은 사람 소개시켜준다고 해서 국경까지 따라왔다가 그 사람이 갑자기 없어져

거리를 헤매는데 모르는 사람이 와서 돈 벌지 않겠냐고 해서 따라 나섰는데 밤중에 

산도 지나고 작은 물도 지났는데 아침이 되니 중국이었습니다. 이때가 2001년입니다. 

조선으로 간다고 하니 다시가면 반역죄가 된다고 반년만 돈 벌고 가라고 하여 동의했더니 

팔아먹은 겁니다. 조선에는 강원도까지 인신매매단이 있는 겁니다. 

아이가 태어나자 다른 여자와 살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가끔씩 와서 때리고 갔습니다. 

신분증 없이 돌봐줄 남편도 없어서 날마다 불안하게 일해서 아들 키우면서 살았는데 

이제는 절대 불가능한 겁니다. 여기서 혼자 17년을 하루도 편히 살아보질 못했습니다. 

조선여자라고 숨어 살면서 혼자 아이 키우며 주변에 천대 받으며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아이에게도 엄마로서 창피해 아이를 아버지에게 보내고 도망치듯 나오며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해서 펑펑 울었습니다. 지금도 웁니다.

한국 사람으로 아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위의 북한난민과 통화하며, 난 아무 고생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살려달라고,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펑펑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삶을 쏟아냈습니다. 

난 아무 고생 없었다는 말, 그녀의 자존심입니다. 

저도 전화를 놓고 한동안 마음이 아파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이들이 잘못이라면 북한에서 태어난 것이고, 지도자를 잘 못 만난 것이지요.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리 살라고 해야 할까요? 

길게는 18년의 오랜 세월을 중국 땅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을지, 

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어린 나이에 겪은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분들은 착취와 체포의 위험이 순간순간을 옥죄는 중국에서 살 수가 없고,

살 길은 한국뿐이라고 합니다. 

이 분들을 구하는 데에는 약 2,800만 원 가량 소요됩니다. 

절박한 기로에 서있는 이들의 생명을 구해주셔서 

우리와 같은 하늘아래서 일상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구호금 입금계좌 및 계좌명: 국민은행 533301-01-050592 북한인권시민연합

  우리은행 142-097009-01-201 북한인권시민연합

 

 

2018년 8월 24일

북한인권시민연합 북한난민구호사업단

단장 이미숙 부단장 엄영선, 김영자 컨설턴트 이성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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