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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사냥꾼에 쫓긴 짐승의 겁에 질린 눈빛… 방관하면 양심에 罪 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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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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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10: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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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사냥꾼에 쫓긴 짐승의 겁에 질린 눈빛… 방관하면 양심에 罪 짓는 것"

입력 : 2018.05.14 03:00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국장] 

"중국서 탈북 여성의 성매매 수난, '현대판 위안부' 
아버지 고향은 개성, 北에 남았으면 나도 똑같은 운명 
이 일에 열정이 없으면 그냥 월급 받는 직장인이 돼…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돌아보지도 의심하지도 않아"

지난 5월 9일에 받은 이메일이다. 〈다시 현장에서 세 명의 여성을 도와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모금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여집니다. 한 여성은 북한 전거리교화소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고, 또 한 여성은 중국 감옥에서 피 토하는 심정으로 5년을 살았습니다. 언제까지 우리 북한의 여성들은 이런 수난의 길을 가야 하는지 참 답답합니다. 이 세 명의 북한 난민을 구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600만원입니다. 우리은행 142-097009-01-201 북한인권시민연합〉

또 다른 이메일은 이렇다. 〈요즘 이어지는 구호 요청에 날마다 밤을 새우지만, 자유를 찾았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피곤함도 눈 녹듯 사라지곤 합니다. 어제 두 명의 여성과 한 명의 남성에게 일상 속에 살 수 있도록 도움 주시기를 부탁드렸는데, 안전한 곳에 도착한 기쁜 소식 전합니다. 이분들은 약 한 달 후 한국에 입국해서 조사와 교육을 받고, 남한 사회에서 좌충우돌하며 정착하겠지요. 추신: 지난 1월부터 현재까지 44명의 북한 난민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발신자는 김영자(64)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국장이다. 그녀는 거의 이틀 간격으로 탈북자 구출 후원금을 모으는 편지를 직접 쓰고 있다.

"요즘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로부터 구해 달라는 요청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우리로서는 이들을 구출할 자금이 없어 쩔쩔맵니다. 중국에서 한 명을 데려오는 데 약 200만원이 듭니다."

―미·북 정상회담 일정이 잡혔고 북한의 태도 변화가 감지되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는 탈북자 구출 활동이 좀 안 맞는다는 느낌도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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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 사무국장은 “탈북자 구출이 늘 똑같이 반복되는 현실은 슬프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북핵과 북한 인권 문제는 같이 가야 합니다. 김정은이 판문점 회담에서 미소를 짓고 나니 그 잔혹함이 다 잊혔습니다. 갑자기 '굿맨'이 됐습니다. 호감도가 70%를 육박했다니, 다들 제정신이 아닙니다. 너무 감성적으로 접근해 북한 정권의 실체를 못 보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북한 주민들은 고통받고 있고 북한 내부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교류 협력이 있었지만 그 뒤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우리는 흔들림 없이 북한 인권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북한 정권은 인권 문제에 가장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왔다. 과거 미국 정부는 북한과의 협상 전제 조건으로 정치범수용소 등 인권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북한의 대외용 수사(修辭)를 선의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데는 이런 인권 문제가 컸다. 서방의 가치관에서는 아우슈비츠를 떠올리게 하는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북한의 3대 세습 독재 체제는 정치범수용소 등과 같은 인권 탄압과 언론 통제로 유지돼 왔다. 인권 문제 제기는 체제 유지와 직결된다. 이번에 북한이 요구하는 '체제 보장'에는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말아 달라는 뜻도 포함돼 있다. 향후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핵 포기를 받아내는 대신 인권 문제는 의제에서 빠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저는 미국이 북한 인권 문제를 외면하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판문점 정상회담이 열리기 닷새 전쯤 미국 상원의원 다섯 명이 아내와 함께 비공식적으로 1박 2일 방한했습니다. 주한 미 대사관에서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조선일보에 보도된 탈북자 3500명 구출한 '수퍼맨'(2월 26일 자)을 만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날 밤 9시 반쯤 저와 수퍼맨, 꽃제비 출신 탈북자 이성주씨 등 3명이 광화문 근처 호텔로 갔습니다."

―야밤에 상원의원들과 어떤 얘기를 나눴습니까?

"상원의원들은 미군 평택기지를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이들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종교의 자유, 억류자들, 탈북자 문제 등을 질문했습니다. 탈북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는지 얘기를 들을 때는 몇몇이 눈물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미·북 정상회담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포함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자정이 넘어 자리가 끝났습니다. 빡빡한 1박 2일 체류 일정에 우리 얘기를 듣겠다는 미국 의원들의 열정에 감동했습니다."

―국내 탈북자는 3만2000여 명쯤 됩니다. 이제 희소성도 없고 그 스토리는 식상해졌습니다. 김 선생도 늘 같은 일을 반복하면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습니까?

"이 일에 열정이 없으면 그냥 월급 받는 직장인이 됩니다. 저는 한번 해야 된다고 생각하면 주위를 돌아보지도 의심하지도 않는 스타일입니다. 한 가지 일밖에 못합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낮으로 미친 듯이 탈북자들을 하나라도 챙겨주기 위해 돌아다녔습니다."

―탈북자들의 행태에 인간적으로 실망한 적은 없었습니까?

"그것에 대해선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 안 해도 됩니다. 중국에서 몸 팔고 성매매당한 탈북 여성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건 인간의 삶이 아닙니다. 이들은 '현대판 위안부'입니다. 제 아버지는 개성에서 피란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북한에 남아 있었다면 저도 똑같은 운명 아니었을까, 이게 내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거죠. 유감스럽게도 우리 여성 단체들은 일제강점기의 위안부만 언급하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비극에 대해서는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젊은 날 학습이나 훈련이 된 '운동권'이 아니었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진학을 못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고 학업에 뜻도 없었다고 한다. 방황하던 시절인 1975년 흥사단에서 한 시국 강연을 듣게 됐다.

"그쪽에 관심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우연히 들어간 것 같아요. 당시 앰네스티(국제인권단체) 한국지부에서 활동하던 윤현 목사님이 강연자였어요.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나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왜 저런 문제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나. 나는 뭐지'하며 감정이 혼란스러웠어요. 그 뒤 앰네스티에 전화를 걸어 '나도 일할 수 있나?'고 물었어요. 타이프를 치는 등 잡일을 했어요. 몇 년 지나서 월급을 조금 받았어요. 돈이 많이 필요하던 나이가 아니었기에 그걸로 족했어요."

북한 인권은 전혀 언급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국제사회에 북한 인권 문제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78년 베네수엘라의 공산주의 시인 알리 라메다가 쓴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에서 겪은 일'이라는 앰네스티 보고서가 나오면서였다.

1965년 북한의 초청으로 방북할 때만 해도 알리 라메다는 사회주의 낙원(樂園)을 생각했던 것이다. 북한에서 특별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북한 주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고 북한은 내가 생각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쓰는 바람에 체포됐다. 그는 미 CIA의 지령을 받고 침투한 스파이 혐의로 노동교화형 20년을 선고받았다. 북한 사리원 수용소에 7년간 수감됐다가 1974년 풀려났다. 그의 체험 보고서가 나왔지만 그 시절 우리의 관심권 밖이었다.

1994년 앰네스티에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북조선 귀국자 명단'을 공개했다. 1959년 말부터 1984년까지 '귀국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에 들어간 재일동포와 동반 가족(일본인 포함) 중에서 '반동(反動)'으로 몰려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의 명단이었다. 그 안에는 노르웨이에 유학 갔다가 1979년 납치된 수도여고 지리 교사 '고상문'의 이름도 들어 있었다.

김영자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국장

"이는 국내에서 북한 인권 문제를 논의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그때 저는 앰네스티를 나와 서예 학원을 하고 있었지요. 윤현 목사님과 김상헌 선생님(북한인권정보센터 명예이사장)이 북한 인권 단체를 논의했어요. 저는 그런 의식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힘들어서 안 하려고 했어요. 어른들이 계속 설득하니 어쩔 수 없이 '조금만 하다가 말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왔어요."

―한국보다 일본이 한발 앞섰지요.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 당시 도쿄대 교수가 '북조선 귀국자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을 먼저 조직했지요?

"일본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름도 그대로 모방해 처음에는 '북한 동포의 생명과 인권을 지키는 모임'(1996년)으로 했으니까요. 창립 과정에서 안혁, 강철환, 이민복 등 탈북자를 난생처음 만났어요. 강철환(전 조선일보 기자)의 얼굴에 감정 표정이 없어요. 정치범수용소에서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마음 아팠어요. 제 가슴에 일종의 죄책감으로 남아 있는 탈북자가 있습니다. 1999년 처음 중국에 가서 만났던 '김힌주'라는 스물여섯 살 젊은이였습니다."

국경 지역인 장백(長白)에서 만난 그는 넘어온 지 한 달 됐다고 했다. 생감자를 먹어서 얼굴은 감자 독으로 부어올라 있었다.

"그는 남한 사람을 처음 만났고 남한의 존재 자체를 몰랐어요. 우리를 만나자 처음 하는 말이 '공안에 신고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어요. 함께 간 간사와 자원봉사자들이 다 울었어요. 그때는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아무런 힘이 없었어요. 저는 귀국해서 '사냥꾼에 쫓긴 짐승의 겁에 질린 눈빛을 봤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양심에 죄를 짓는 것이다'라는 보고서를 냈어요. 그 뒤로 탈북자 구출 사업이 시작된 겁니다. 하지만 그 젊은이를 못 구한 것은 마음에 늘 남아 있어요."

―기억에 남는 다른 탈북자 사례가 또 있습니까?

"중국에서 인신매매를 당할 처지에 놓인 '란'이라는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이 아이를 구출할 때 여기서 일하던 인턴이 한 달 봉급 50만원을 내놓았어요. 란이는 들어와서 아이 둘을 낳고 잘 살고 있어요. 2004년에는 탈북 소녀 세 명을 구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어요. 이 사실을 알고 외국어 학원을 하던 분이 1800만원을 보내줬어요. 제가 라오스에서 기다렸다가 그 아이들을 받아 방콕까지 데려다줬어요. 차 안에서 아이들을 보면서 '왜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는지' 많이 울었어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3/201805130183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