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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U-Bridge 참가보고서] 한반도 통일, 역사에서 해답을 찾다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20-05-25 11:24:13
조회수 :
167

2019년 6월 30일부터 7월 22일까지 U-Bridge 탈북대학생 리더십 프로그램으로 지도교수 원재천 이사, 허만호 이사, 담당자 요안나 호사냑, 차미리, 남북청년 7명이 네덜란드 헤이그와 라이덴, 독일 베를린 등 5개 도시를 방문해 전환기에 대해 배우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나 된 한반도를 위해 우리가 과거청산 과정에서 미숙했던 점은 무엇이었는가,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정의’인지, 올바른 정의 구현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준비해야하는지, 어디까지 가해자로 보고 처벌을 할 것인가 등 많은 것을 배웠다. U-Bridge 참가 후, 학생들이 본인들의 전공과 연결해 각자의 분야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작성한 보고서를 연재하고자 한다. 

 

 

 

 

 

한반도 통일, 역사에서 해답을 찾다

김주헌

연세대학교 통일학협동과정 (석사수료)

 

 

□ 들어가며

한반도의 분단은 한민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나의 외조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조부의 가정은 일본에 거주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원폭으로 인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외조부는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고모(혹은 이모)와 함께 하고 싶은 공부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삶을 살았다. 이런 이야기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렇게 분단은 세대를 넘어 나에게도 다가온 것이다. 분단은 어디에서 왔을까? 앞으로 대한민국은 어떤 길을 걸어야 한반도 통일을 이룰 수 있을까?

 

□ 한반도 분단의 시작: 헤이그 특사와 일제강점기, 그리고 한반도 내 두 개의 정부 수립

나는 한반도 분단의 시발점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찾을 수 있었다. 1905년 일본제국과 을사조약으로 인해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일제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는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그 노력 중 하나가 바로 ‘헤이그 특사’였다. 식민지시대에도 조선인들은 일제에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3·1운동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출범시키며 흩어진 힘을 모았다. 독립운동가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독립을 위해 힘썼으나,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인해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했다. 한반도가 미군정과 소련군정이 통치하는 구역으로 나뉘어졌다. 1948년 남한과 북한에 두 개의 정부의 수립으로 인해 점차 분단이 짙어졌고,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으로 인해 분단이 고착화되었다. 2020년 현재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 독일의 분단과 재통일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5월 9일 나치 독일의 항복과 1945년 8월 15일 일본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종결되었다. 독일은 일본과 함께 연합국에 의해 통치를 받았으나, 4대 연합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통치를 받았다. 이후 1949년 5월 23일 서독과 1949년 10월 7일 동독의 등장으로 독일의 분단이 시작되었다. 서독과 동독을 기점으로 약 1,400km의 내독 간 국경이 생겼다. 내독 간 국경은 독일인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1985년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등장은 분단된 독일에게 축복이었다. 고르바초프는 개방을 상징하는 글라스노스트(Glasnost)와 변화를 뜻하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라는 슬로건을 내걸었으며, 이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고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서독의 연방 일부로 가입한다. 

 

□ 통일 독일의 정치교육

독일의 재통일로 인해 동독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등의 문제를 청산해야 하는 숙제가 생겼다. 슈타지라고 불리는 국가보안부로 인해 희생당한 이들을 비롯하여 NSDAP의 희생자들, 그리고 그 반대급부인 가해자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독재청산재단의 『통일 독일에서의 과거 공산주의자 청산문제』에 따르면, 보상문제와 명예회복, 그리고 복권문제를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동독의 슈타지들은 사회주의통일당을 보좌하기 위해 동독 주민들을 감시했다. 슈타지 감옥에서는 물리적인 고문이 아닌 정신적인 고문을 했기에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애매한 상황이 벌어졌다. 오히려 슈타지는 수감자들의 건강을 위해 자국 내에서도 가장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의료진들을 슈타지 감옥 내에 배치하여 인권을 챙기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누군가는 엄중 처벌이 되지 않아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현상을 보고 오히려 독일인들의 반성이 더욱 느껴졌다. 그것은 바로 재발 방지를 위한 정치교육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서독)의 주 정치교육원에서는 나치 독일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정치교육을 이어갔다. 정치교육원은 재통일 이후 동독 지역에도 생겼으며, 나치 독재 실상을 알리고 독재 청산과 반성, 민주주의 진작 및 고취를 위해 지역사회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가해자의 처벌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역사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독일인들은 역사를 기록하고 정치교육을 통해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이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 나가며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약 3주 간의 현장조사를 끝내면서 많은 것을 느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이었다. 독일에는 무려 15개의 국경박물관이 존재하며, 11개의 동독 역사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슈타지 문서보관소 등의 다소 부끄러운 역사까지 후대와 국제사회에 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한의 경우 1996년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한 사례가 있다. 이는 독일의 기록·보존이 아닌 파괴를 통해 자국의 치욕적인 역사를 없앤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사례를 파괴가 아닌 끊임없는 기록과 보존을 통해 후세에게, 그리고 국제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플 때 병원에 가서 어디가 아픈지 의사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치료한다. 이는 곧 빠른 치유를 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이며, 일본제국에 의해 피해를 입은 나라이자 분단 트라우마를 여전히 겪고 있다. 우리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면 치료할 수 있는 확률이 줄어든다. 독일의 재통일은 시민사회의 역할도 중요했다. 종교계와 시민들의 월요시위, 그리고 슈타지 문서보관소 등을 점거하는 활동을 통해 재통일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또한 이들은 동독 당국과 시민사회와의 라운드테이블 설치로 인해 사회 전반부와 통일을 논의하기도 했다. 한국 역시 정부가 통일을 주도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진 시민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야 할 것이다. 물론 통일부에서 통일국민협약을 위해 진보와 보수진영의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있으나, 이는 시작 단계이기에 더욱 탄력적인 진행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지속적인 교류·협력이다. 북한의 시민사회가 깨어나지 않는 이상 한반도 통일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역사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나타난다. 바로 후삼국통일 과정에서 나타난 고려와 통일신라와의 관계이다. 후백제의 경우 927년 통일신라의 수도인 금성에 쳐들어와 경애왕을 살해하는 사례도 있었다. 신라의 민심은 온건 정책을 펴는 고려에게 넘어갔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은 자국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신라를 고려에 이양한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죽이지 않았다. 다만 고려의 수도 개경과 가까운 곳, 즉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 인근에서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와 함께 살게 했다. 통일은 남한 주도로 이루어질 확률이 높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백기를 들고 투항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우리는 국사와 세계사의 흐름을 통해 가용할 수 있는 채널과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북한 인권 유린의 대표자인 김정은 위원장을 감정적으로는 싫어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유브릿지 2019를 통해 이성과 감정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거듭 느꼈다. 이는 곧 감정적으로 김정은을 사형하는 것이 아닌, 법의 심판을 통해 역사를 기록하고 거기에 세대를 거듭하여 그의 만행을 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역시 외할아버지 혹은 그 위에서 내려온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해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받았다.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도 여전히 분단 트라우마로 덮인 이 사회에서 시민사회와 정부, 그리고 국제사회의 협조를 통해 국제사회에 평화를 전파하는 국가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