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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의 구호노트] RESCUE : 조용하고 안전하게 "시민연합, 2018년 한 해 동안 북한난민 230명 구출! 많은 쉰들러의 도움으로 창립 이래 1,020명 구출"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9-04-05 13:53:58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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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cue: 조용하고 안전하게


시민연합, 2018년 한 해 동안 북한난민 230명 구출! 

많은 쉰들러의 도움으로 창립 이래 1,020명 구출

 

 

북한인권시민연합은 1996년 창립 이래 북한난민 구호 사업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습니다. 갈 곳 없는 북한난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동남아시아 등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안전한 길로 이끌며, 중국에 숨어있는 북한난민에게 음식, 의약품, 옷가지 등을 제공하는 구호활동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으로 강제송환 될 경우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 여성, 어린이를 최우선적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안전하게 구조해 2018년 12월 말까지 1,020명을 구출했습니다. 2018년 11월과 12월에는 17명의 북한난민이 우리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해 2018년 한 해 동안 230명을 구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북한난민의 사연을 올립니다. 

 

 

 

 

11월에 구출된 17명

모녀(이OO 1986년생 여성‧함경남도, 왕OO 2014년생 여아), 모자(이OO 1982년생 여성‧양강도, 이OO 2016년생 여아), 모녀(박OO 1983년생 여성‧양강도, 류OO 2014년생 여아), 모자(김OO 1986년생 여성‧함경북도, 장O 2008년생 남아), 리OO 1981년생 여성‧함경북도, 김OO 1966년생 여성‧함경북도, 배OO 1970년생 여성‧함경북도, 모녀(안OO 1989년생 여성‧함경북도, 리OO 2014년생 여아), 구OO 1972년생 여성‧함경북도, 장OO 1972년생 여성‧함경북도, 모자(림OO 1985년생 여성‧황해북도, 왕OO 2012년생 남아)

 

 

이OO와 딸

1982년생 여성, 양강도 

어머니는 차사고로, 아버지는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이집 저집으로 보내져 살았는데, 학교 졸업 후 군수 공장에서 일했지만, 월급이 너무 적어 먹는 것도 해결이 안됐습니다. 그러다가 중국 가서 돈 벌려고 강을 넘어 팔렸는데, 남편은 나를 사 왔다고 사람 취급을 해주지 않아 딸 낳고는 도망쳐 나와 아이 생각에 잠도 못자고 허약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정신을 차리고 식당에서 일 하다가 지금 남편을 만나 애 낳고 살았지만, 결국 천대와 신분의 위험 때문에 우는 아기를 들쳐 업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박OO와 딸

1983년생 여성, 양강도

저는 의대를 졸업하고, 월급 3천원 받고 일하다가 먹고 살 수 없어 그만두고 장사를 하다 돈을 벌기 위해 중국으로 나왔지만,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신분 문제가 제일 가슴이 아팠습니다. 내가 신분이 없어서 아이 호구등록이 안되고, 아플 때나 필요한 것 있으면 돈이 없어 아무것도 못 사줬습니다. 남편도 감시가 심했습니다. 지금 다리를 잘못 쓰고 있습니다. 요골 협착증이 와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어 걸음을 잘 못 걷습니다. 

 

안OO와 딸 

1989년생 여성, 함경북도 

조선에서 너무 가난했고, 영양실조로 다리 관절병이 생겨 힘들게 살았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바쁘니 엄마가 중국 가서 돈벌어 내 병고치고 오자고해서 엄마랑 같이 중국으로 나왔지만 엄마와 나는 따로 팔려갔습니다. 나는 돈 없는 가난하고 반정신 이상인 바보랑 살면서 아이를 낳고 살면서 엄마를 울면서 찾다가 4년 전 찾았습니다. 엄마도 술주정뱅이에 매 맞으며 고생스럽게 살았습니다.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가 산골아줌마가 다된 나를 몰라봐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엄마는 심장이 멎는 것 같다면서 나를 만져 봤습니다. 엄마는 같이 도망쳐 한국 가자니까 매 맞고 살면서 병이 심해서 한국갈 수 없다고 나만 가라고 했습니다. 불쌍한 엄마입니다. 우리 조선여자들의 운명이 이렇습니다. 

 

구OO

1972년생 여성, 함경북도 

아버지가 병이 있어 내가 중국에 가서 돈벌어 약 사온다고 약속하고 중국에 들어 온건 데 중국 와서 팔려가 돈도 못 보내고 돌보는 사람 없으니 아버지가 간복수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나올 때 3살 된 딸을 언니에게 맡기고 왔는데, 아직 아이소식을 몰라 매일 눈물로 보내고 있습니다. 내가 팔린 곳은 아주 산골이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남편이 술을 많이 먹고 언어폭력이 심해 살기 힘듭니다. 남편이 돈도 벌지 못해 살기 힘든데 아이는 커지고 돈쓸 일이 많아 공부시키는 것도 힘들었고 공민증이 없어서 더 힘들었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들 이렇게들 불쌍하게 사는 것이 중국에서 일반적입니다. 내가 고생한 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조선여자들은 정말 불쌍합니다. 모두들 도와주세요. 이제 나는 한국 가는 길 만나서 도움 받고 가는데 여기 매 맞고 잡혀가는 사람들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배OO 

1970년생 여성, 함경북도 

결혼 1년 만에 남편이 죽어 친정 엄마한테 와서 살았지만 정말 생활이 곤란했습니다. 너무나 살기 어려워서 중국으로 나온 후 엄마소식은 모릅니다. 불효를 한 겁니다. 강을 넘을 때가 2월말이었는데, 추운 강은 얼음과 칼바람에 발이 저릴 정도였습니다. 얼음판에 미끄러지고 넘어지기를 여러 번 하고 도작한 중국에서 인신매매하는 남자들은 내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나를 팔아먹었습니다. 산속 외진 농촌생활은 살기 힘듭니다. 겨울에는 나무를 팔아 벌고, 이것저것 일 년 동안 벌어도 1만원이 넘지 않았습니다. 그 돈으로는 밥 먹고 아이들 학비는 생각도 못할 지경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큰 결심하고 남편에게 살 방법이 없다고 울면서 말했더니 자기도 병도 있고, 먹여 살릴 방법이 없으니 한국에 가라고 했습니다. 막상 가려하니까 마음이 바뀔 것 같아 즉시 도망치 듯 나왔습니다. 한국에 가서 사람답게 한번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22년간의 활동을 돌아보며

 

2018년 한 해 동안 230명의 북한난민을 구출했고, 창립 이래 북한난민 1천20명의 생명을 구출했다는 것! 지금도 믿겨지지 않습니다. 벌써 22년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으며, 그 동안의 활동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중국에서 만난 깡마르고 내 품에 쏙 들어오는 20대 여성, 중국 공안에 잡힐까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만 있어 몸이 가분수로 된 아이들. 이가 다 빠져 보기에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정작 3, 40대. 이들을 이끌고 중국에서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 등지를 같이 먹고 자고 이동하며 행여 잡힐까봐 몸을 숨기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동차 펑크로 고생했고, 몇 시간을 산을 넘으며 미끄러지고, 다리가 아파 울기도 했습니다. 

 

처음 이 활동을 시작하며, 내 마음을 파고든 러시아에 노동자. 나라면 이들을 내 집에 들여놓을 수 있을까? 반문하며 이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 때부터 손이 닿는 대로 도움을 주어 한국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보내온 사연 중 일부분을 적습니다. 

 

“나는 북조선 사람이다. 좀 도와달라. 

빵 한 쪼각 더운 차 한 고뿌만 줄 수 없는가. 

몸이라도 좀 녹일 수 있게 해달라”

 

“추위에 떠는 초췌한 사람이 당신의 집 대문을 두두리고 있다. 

눈물이 글썽하여 애원하는 그를 당신은  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 놓은 적 있는가. 

인도주의나 자선 같은 말은 구만 두고라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사는 사람으로써 

기꺼이 그에게 의자를 권한 적 있는가…”

 

그리고 1999년 중국에서 만난 28세의 김흰주 씨!

부모님은 굶다 2년전 돌아가셨고, 여동생도 굶다 병으로 작년에 죽었습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나도 죽을 것 같아 남동생 손을 잡고 강을 넘었습니다. 3개월 전에 공안에 쫓기다 동생을 잃었습니다. 제발 나를 중국 공안에 넘기지 마세요. 한국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북한에는 희망이 없고 북으로 돌아가기 싫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우리 일행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에 땅에 털썩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돌아서 오는 길, 그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냥꾼에 쫓기는 짐승 같았고, 우리가 그들을 외면한다면 양심의 죄를 짓는 것이라 생각하고 지금껏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10대의 어린 소녀, 소년이 기차를 타고, 오토바이로 달리고, 배로 강을 건너고, 자동차로 달리고, 다시 기차를 타고 방콕에 도착해 주태국 한국대사관에 들여보내고는 어째서 어린 아이들이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누구의 잘못인지, 북쪽에서 태어난 것이 잘못인가? 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습니다.  

 

이 활동을 시작했을 때 어린 아이들이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했던 말입니다. 

“몇 번이나 팔렸습니다.”, “삶에 희망이 없습니다.”,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우리를 살려주세요.”

그런데 22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의 외침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12월 말에는 우리의 도움으로 자유를 찾은 분들의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4세, 7세의 두 딸을 둔 여성은 북한에서 배우지 못해 글을 잘 모른다고 공부하고 싶다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두 자매는 남편을 만나 언니는 1월에 아기가 태어날 예정이고, 동생은 임신 6개월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살 수 있게 도움준 것에 대해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 구출비용을 받지 않으니 북쪽의 가족들에게 돈도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헤어지며 손을 잡고 포옹도 하고 사진도 남겼습니다. 

 

이렇게 북한난민 구출활동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 시키는 일이며, 북쪽의 가족에게 희망이 되고, 우리 사회에도 희망을 심는 일이입니다. 도움주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북한난민 1천20명을 구한 큰 이정표를 지나, 인간다운 삶을 위한 ‘희망 나눔 프로젝트’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함께해주십시오. 

 

구호기금계좌 국민은행 533301-01-050592 

예금주 북한인권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