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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의 구호노트] RESCUE : 조용하고 안전하게 "시민연합, 1월과 2월 북한난민 12명 구출!"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9-03-15 14:08:06
조회수 :
230

Rescue: 조용하고 안전하게

“시민연합, 1월과 2월 북한난민 12명 구출!”

 

 

북한인권시민연합은 1996년 창립 이래 북한난민 구호 사업을 꾸준히 펼쳐오고 있습니다. 갈 곳 없는 북한난민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동남아시아 등 제3국을 경유해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안전한 길로 이끌며, 중국에 숨어있는 북한난민에게 음식, 의약품, 옷가지 등을 제공하는 구호활동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으로 강제송환 될 경우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 여성, 어린이를 최우선적으로 최대한 조용하고 안전하게 구조해 2018년 12월 말까지 1,020명을 구출했습니다. 2019년 1월과 2월에는 12명의 북한난민이 우리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했습니다. 성금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북한난민의 사연과 후원자분들의 응원 메시지 등을 올립니다. 

 

 

 

 

1월에 구출된 10명

로OO 19783년생 여성⋅함경북도, 박OO 1992년생 여성⋅양강도, 장OO 1992년생 여성⋅양강도, 임OO 1982년생 여성⋅함경북도, 손OO 1992년생 여성⋅양강도, 방OO 1988년생 여성⋅양강도, 모녀-엄마 서OO 1972년생 여성, 딸 김OO 20003년생 청소년⋅함경북도, 손OO 1989년생 여성⋅양강도, 박OO 1995년생 여성⋅양강도, 

 

2월에 구출된 2명

모녀-엄마 리OO 1962년생, 딸 박OO, 1986년생·함경북도

 

 

# 방OO, 1998년생 여성, 양강도

어려서 외동딸로 부럼 없이 곱게 자랐지만, 아버지 병이 깊어 사망하고, 빚진 돈을 갚아야 해서 돈을 더 벌려고 어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2011년 늦가을 추운 강을 넘고 나니 내가 뭐에 홀린 듯 했다는 생각이고, 엄마에게 말도 못하고...., 엄마생각에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아주머니가 말한 일한다는 곳이 바로 어느 가난한 농촌으로 팔려가 아이를 키우며 돈이 없어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12월,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될 위기에서 남편이 오만위안이라는 큰 빚을 얻어 벌금을 내고 풀려났습니다. 북송은 안 되었지만 또 누가 신고할까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산 속에 숨어있고, 마음조리며 사는 것을 본 남편이 한국으로 가라고 해서 집을 떠났습니다. 이런 내 모습이 여기 살고 있는 조선여자들의 불쌍한 모습입니다. 한국가면 떨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마음에 큰 희망이 생긴 겁니다. 

 

# 모녀(40대 엄마 성애영, 10대 딸 향수), 함경북도 

나는 어린딸과 2008년 한 겨울에 중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나는 일하던지 시집을 가든 어떤 것도 상관없었습니다. 딸과 배 골지 않고 안전하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다 한족인 마음이 안 좋은 게으른 남자에게 팔려 시집가서 아이 낳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차별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데리고 온 딸이 잘못될까봐 아무 말 못하고 시키는 대로 죽은 듯이 살았습니다. 저는 중국생활이 모두 두렵고, 무섭습니다. 특히 조선여자들이 공안에 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을 때 제일 두렵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은 것과 같다고 결심하고 남편이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도망쳤습니다. 불쌍한 딸과 자유롭게 공부시키고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 모녀(엄마 이순, 50대 여성, 딸 백희순, 30대 여성), 함경북도

북한에서 혼자서 아이들을 힘들게 키웠고, 어려움이 더해지자 둘째딸은 탈북하고 큰딸과 살았습니다. 큰사위는 어린 아들을 남기고 탄광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큰 딸이 아들 데리고 사는 것이 힘들자 남자를 만나 우리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이 남자가 폭력으로 엄마인 나를 내쫓고 이틀이 멀다하고 딸을 때려서 딸이 아이를 들쳐 업고 도망나왔습니다. 도망나온 때부터 죽은 사위가 다니던 탄광에서 일했지만, 사는데 도움이 안 되었고, 아들마저 병으로 죽고 난 다음 나와 딸은 조국을 뒤로하고 2015년 봄에 강을 넘었습니다. 강을 넘자마자 우리 모녀는 나뉘어서 팔려갔습니다. 딸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나는 가난하고 돈이 없어 병원도 갈 수 없는 70살 농촌 노인에게 팔려가서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딸은 환자에게 팔려가 고생만 죽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억울했지만 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버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던 딸이 도망쳐 나와서 한국에 갈 수 있다고  빨리 도망치자고해서 따라나섰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나선 겁니다. 이제는 돌아갈 길도 없는 길입니다. 나보다 불쌍한 딸을 살려주세요. 

 

 

응원메시지와 탈북민 소식

“늘 부자유스럽고 고통 중에 있는 북한 주민들의 갈급해 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면서도 고마움을 모르고 살기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새해 들어 이런저런 감사함을 나 혼자 누리는 것 같아 하나님께 돌려드리느라 3일간의 금식기도를 마무리하고 식사를 대하면서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수고하시는 분들이 생각나더군요.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어려움을 해소해주려고 온갖 수고를 하시는데, 특별히 먼 타국에서 이방민족들의 아픔까지도 애달파하며 수고하는 요안나 선생도 계시고,... 이 수고하는 분들을 위로했으면 하는 마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 같아 작은 마음을 담았습니다. 국장님께서 수고하시는 분들에게 맛있는 식사라도 대접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늘 수고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2월 14일, 어린 두 자녀를 키우는 젊은 아빠가 사무실을 방문하셔서 제가 시민연합 활동을  소개하는 가운데, 탈북청소년들이 제게 해주었던 말을 전했습니다. “국장님!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공개처형을 봤습니다. 지금도 꿈에서 그 장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깨면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습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어서 꽃제비들과 북한난민들의 고단한 삶을 이야기해주었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어떻게든 시민연합을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 분이 집으로 돌아가며, 제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시민연합이 유니세프가 되고, 월드비전이 되길 바랍니다. 정말 몰랐던 현실이었네요. 국장님 사람으로서 감사드려요” 

 

1월과 2월에는 시민연합의 도움으로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 몇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사시는 곳이 모두 서울 근교이기는 하지만 모두 외곽지역이어서 하루에 한, 두 가정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군포에 사는 자매는 결혼해서 언니는 예쁜 아기를 낳았고, 동생은 출산 예정이 6월이라고 합니다. 또 한 가정은 4세와 7세의 어린 딸과 사는 30대 엄마가 어찌나 밝고 씩씩한지... 북에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해 글의 뜻을 잘 몰라 공부를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여 검정고시나 공부하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2월 15일에는 14명의 탈북민이 사무실을 방문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갔습니다. 하나원 기수 250기, 251기인 이들은 하나원을 나온 지 한달 또는 보름밖에 되지 않아 사무실을 찾는 것도 어려웠을 텐데 약속시간 늦지 않고 모두 참석했습니다. 탈북민들도 하나원 퇴소 후 처음 만나는 자리여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등 정신없는 가운데 저녁을 했습니다. 모두 밝고 자기의 의견이 확실하지만, 북한과 중국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남한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내야 할 지 걱정이 많고 너무 외롭다고 합니다. 아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당연한 것이겠지요. 우리가 힘을 낼 수 있게 늘 응원해주어야겠습니다. 이 들이 한국에 오면, 북한이나 중국에 있는 가정에 돈을 보낼 수 있어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결혼해 아기를 낳으니 남쪽 사회에도 희망이 됩니다. 앞으로 더 많은 탈북민이 자유를 찾아 자신의 꿈을 찾기를 바랍니다. 

1월 9일에는 특별히 박범진 이사장님을 모시고 경기도 이천에 사시는 국군포로 유영복 할아버님 댁을 다녀왔습니다. 90이신데도 건강이 좋아 보여 다행이었습니다. 한국에 오신 국군포로 할아버님이 80분이신데 다 돌아가시고 이제 27분만이 생존해 계신다고 합니다. 북에서 고생하신 말씀, 남쪽 생활하며 느끼신 것을 나누고 맛난 점심도 했습니다. 유영복 할아버님이 역사박물관에서 6·25 정전 65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전쟁 포로' 특별전에, 전쟁 중 북에 잡혀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을 보며, 북에 끌려가 광산이나 탄광에서 죽을 고생하다 숨져간 국군포로들은 무엇인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숨져간, 포로를 잊는다면 이것이 과연 국가인가? 울분을 토하셨습니다. 늘 국군포로 할아버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은 마음이 착잡합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인데, 무엇 때문에 국군포로 이야기가 뒷전으로 밀리는지 안타깝습니다.

 

2월 22일, 탈북청년 김혁 씨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북한에서 일찍 부모를 여위고 고아원에서 자랐고, 거리에서 꽃제비생활을 하다 중국에 다녀온 것 때문에 전거리교화소를 3년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것이지요. 2002년 하나원에서 김혁 학생을 만났고, 2004년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회의에 함께 했고, 2014년 인도네시아 회의에도 함께해 주 인도네시아 북한대사관원들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하나원을 퇴소하고 학교보다는 현장에서 일을 했고, 그 과정에서 배워야 된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그때부터 시민연합에서 일했던 이영환 씨의 조언을 받으며 학사, 석사, 그리고 박사까지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의지가 대단했고, 끝까지 버텨서 자신의 꿈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자랑스런 김혁 박사에게 박수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김혁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