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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곳, 북한 ④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8-07-20 10:10:46
조회수 :
417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곳, 북한 ④

 

 

                                       증언자: 이위력

                                              2010년 탈북, 2010년 한국 입국 

                                       <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원 과학수사학과 재학>

       편집: 김소희 <캠페인팀 선임간사>

       삽화: 안충국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재학>

 

 

 

고아원에서의 죽음

 

나무 지고 밤 12시쯤 고아원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인원 검열이었습니다. 항상 한, 두 명 정도 인원이 비었습니다. 힘들어서 쉬다가 대열에서 떨어지는 학생들이 꼭 있었습니다. 나무하러 가기 전에 우리끼리 이탈하지 말자고 합니다. 그래서 제일 똑똑하고 빠르고 길을 잘 아는 아이가 앞에 서고, 제일 힘이 센 아이가 뒤에 서서 갑니다. 그런데 고아원에 돌아와서 인원 검열을 하는 시간이 밤 12시입니다. 이 시간이면 다시 데리러 갈 수가 없습니다. 가다가는 우리도 죽습니다. 다음날 날이 밝아 찾으러 가면 성에가 낀 채로 눈 뜨고 죽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친구들도 꽤 있습니다. 정말 불쌍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한국 사람들이 저보고 정말 고생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고생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축복받고 선택받은 것입니다.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눈을 떠보니 북한이라는 이유로 이런 삶을 살고 죽어야 한다는 것에 기가 막힙니다.   

 

고아원에 있으면서 선생님들 소토지(밭)에서 농사도 많이 지었습니다. 그 일도 나무 베러 가는 것만큼 좋았습니다. 특히 점심으로는 선생님이 도시락을 싸서 제공해 줬는데 양이 많았습니다. 그 점심을 먹기 위해서 손톱이 빠질 정도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나면 정말 행복했습니다. 고아원에 있으면서 죽는 아이들을 많이 봤는데, 가만히 보면 착한 친구들이 다 죽었습니다. 선생님 말, 학교 말, 지침에 따른 아이들만 죽었습니다. ‘나가지마, 훔쳐 먹지마, 주워먹지마, 자유주의 하지마’이런 말을 지킨 아이들만 죽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두부를 훔쳐 먹다

 

저는 그런 것 안 지키고, 제 구호가 ‘맞으면서도 먹자’였습니다. 일화를 하나 말씀드리면, 자유주의해서 시장에 나갔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대야에 물을 담궈 놓고 두부를 팔고 있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도 두부가 전재산이고, 집에 자식들이 있을 것이고, 두부를 팔은 돈으로 식량을 사서 집에 있는 아이들을 먹여야 하는 그런 상황인 것을 잘 아는데, 두부를 보니까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훔쳐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저는 영양실조로 죽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기에 두부를 훔쳐서 먹고 뛰기에는 너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일단은 먹자하고, 그 대야 앞에 푹 주저앉아서 막 먹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이 통곡을 하고 울면서 쇠 꼬챙이로 머리를 때리는데, 피가 흘러서 두부 대야가 새빨게 졌습니다. 그래도 저는 계속 먹었습니다. 주인은 울면서 계속 때리고, 정말 많이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분을 이해하고, 그분께 정말 미안합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만나게 되면 두부 천 모 정도 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맞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먹으면서도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먹어서 행복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머리는 피투성이고, 손에 두부찌꺼기가 조금 남아있었습니다. 그걸 누나한테 갖다 주니까 누나가 울면서 안 먹겠다고 하는 걸 입에다 밀어 넣었습니다.

 

고아원에서는 돈 벌이로 토피(흙벽돌)를 찍어내는 일도 했습니다. 토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흙을 파서 그 안에 볏집을 넣고, 물 넣고, 반죽을 한 다음 나무 상자로 벽돌을 찍어내야 합니다. 당시 토피가 엄청난 가격으로 팔렸는데, 북한에 옛날에 지은 개인 집들을 다 허물고, 길이나 중앙도로 옆의 집들은 새 집으로 다시 건설하라는 교시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교시 이유가 수령님이나 장군님이 지나갈 때 헌 집을 보게 되면 마음 아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토피는 돈으로 팔렸는데,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은 토피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일 년 동안 토피 몇 만장, 몇 천만장을 찍어 냈습니다. 토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흙을 파는 것이 가장 문제였습니다. 진흙을 파기 위해 땅을 뚫었는데, 땅을 보면 층이 있습니다. 모래층, 흙층, 돌층, 진흙층, 석탄층이 있는데, 진흙층까지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 아이들이 호미로, 작은 손으로 팠습니다. 그리고 들어가면서 보호대나 보호 시설이 있어야 되는데, 그런거 없이, 아이들이 맨 몸으로 뚫고 들어갔습니다.

 

소옴반이라고 해서 한 소래를 담아서 뒤로 넘기면 다음 사람이 또 받아서 다음 사람한테 넘기는 형식으로 진흙을 빼내었습니다. 아이들이 땅 밑으로 개미처럼 들어가 있었습니다. 한국처럼 옆에서 안전요원이 보살펴 주는 것도 아니고, 또 땅위로는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니까 흙층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흙층 무게가 몇 백톤일 텐데 애들 위로 쏟아지니, 흙을 치우면 깔렸던 아이들 뼈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친구들도 많습니다.(계속)

 

 

진흙으로 토피를 만들고 있는 고아원 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