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

[증언]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곳, 북한 ②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8-04-04 14:05:30
조회수 :
742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곳, 북한 ②

 

 

                                       증언자: 이위력

                                              2010년 탈북, 2010년 한국 입국 

                                       <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원 과학수사학과 재학>

       편집: 김소희 <캠페인팀 선임간사>

       삽화: 안충국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재학>

 

 

 

저와 누나는 그 봉강역에서 한 삼일 정도 있었습니다. 역전 앞에서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물론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누나가 나를 끌어안고 나는 누나 무릎 위에 있었는데, 정말 내가 죽어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계속 졸리고, 파리가 주변에 몰리기 시작하고... 그래도 누나가 끌어 안아줘서 따뜻했는데, 갑자기 어느 순간 추워서 눈을 떠 보니 누나가 옆에 없었습니다. 너무 당황하고 무서워 소리 낼 힘도 없이 끅끅거리며 울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나가 돌배라고 아직 여물지 않은 딱딱한 배를 다섯 알을 꼭 끌어안고 오고 있었습니다. 누나는 그사이 배를 훔쳐온 것이었습니다. 누나가 배를 딱 다섯 개 꺼내자, 참 못났지만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누가 세 알을 먹지?’ 였습니다. 그런데 누나가 제게 세 알을 주었고, 저는 그 딱딱한 배를 게 눈 감추듯 싹 다 먹었습니다. 단물이 살짝 들어가니까 정말 눈이 떠지면서 거짓말처럼 힘이 생겼습니다. 배를 먹고 힘을 내서 다음 열차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열차는 그날 오후에 들어왔는데, 사정해서 겨우 탈 수 있었습니다. 

 

가까스로 할머니 집에 도착하니, 할머니께서 우리 남매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무슨 일이냐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할머니께서 우리를 씻겨 때를 벗기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입히고, 집에 들어가니 원래 할머니, 할아버지만 사는 집에 열명이 우글우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병원 의사들만 오십 명이 있는 큰 온성 철도병원 원장을 하셨는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 되면서, 그래도 원장인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들 보다는 조금 형편이 낫다고, 가족들이 모두 이 집으로 몰린 것이었습니다. 굉장히 안 좋은 상황에서 우리까지 들어가게 되자 누나와 저는 눈칫밥 먹으면서 지냈습니다. 다른 사촌들은 엄마나 아빠 믿고 팡팡 뛰는데, 우리는 기가 죽어서 조용히 있었습니다. 한 1년 정도 그렇게 있었는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어 사정이 더 안 좋아지니, 할머니께서 우리보고 고아원에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할머니 제자가 고아원장을 하고 있어서 우리를 잘 봐달라고 하며 우리를 맡겼습니다. 할머니가 우리를 고아원에 데려다 주느라 삼십리 정도 걸어가는 길에 엄마가 며칠 있으면 올 것 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면서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도 엄마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고아원 애들이랑도 친해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고아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처음에 들어가니까 기가 막혔습니다. 그때 당시 역전에 나가면 죽은 아이들도 많고, 시체도 많았는데, 부모있는 아이들도 죽어 나가는 판에 고아원에 살고 있는 아이들을 상상해보세요. 눈만 빤짝빤짝한 아이들이 누나와 나를 보고 텃세를 부리면서 ‘니네 뭐야’하면서 우리를 애워싸는데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그런 상황인데 밥을 먹으라는 소리가 들려서, 아이들과 함께 모두 대열을 맞춰 노래를 부르면서 식당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들어가니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나면서, 묵지밥이라는 옥수수 가루 밥을 주는데 기가 막혔습니다. 비위가 약해서 토가 욱욱 올라오는데, 옆에 있는 애들을 보니 벌써 그릇이 다 비워져 있었습니다. 제가 못 먹고 있으니까 애들 눈빛이 다 저한테 쏠렸습니다. 깔짝 깔짝 거리다가 점심시간이 끝나서 일어섰는데, 밥 그릇을 보니까 벌써 빈그릇이 되어 있었습니다. 애들이 그 정도로 빨랐습니다. 그 때 정말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번뜻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이틀 정도 거의 굶었습니다. 사람이 신기한 것이 그 쯤 되니 묵지밥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아원에는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든 연령대가 있었습니다. 제가 8살 때 쯤 들어갔는데 그때 키가 1m 20cm정도였고, 반에서 제일 컸습니다. 고아원 아이들은  졸업반인 18살이 1m 50cm일 정도로 작았습니다. 고아원 생활은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청소하고, 이불 정돈하고, 마당 청소하고, 7시에 밥 먹고, 7시 30분부터 학교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독보회, 행진 등을 하고 나면 8시에 수업 시작하고, 12시에 밥 먹고, 다시 오후 2시까지 수업을 하고, 나머지는 방과 후 활동을 하는 것이 원래 규정인데, 이게 지켜진 날이 얼마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오전에 수업하고, 오후에 일하러 나가고, 아니면 오전‧오후 일했습니다. 거의 매일 일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일은 학교의 부업반, 즉 학교의 농장 일을 하고 겨울에는 나무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계속) 

 

 

돌배를 꼭 끌어 안고 있는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