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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곳, 북한 ①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8-01-22 10:2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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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 곳, 북한

 

증언자: 이위력

2010년 탈북, 2010년 한국 입국

<동국대학교 경찰사법대학원 과학수사학과 재학>

편집: 김소희 <캠페인팀 선임간사>

삽화: 안충국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재학>

 

 

나는 1988년 함경북도 김책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 안전원이었던 아버지가 수용소로 보내지고, 어머니는 중국으로 넘어갔다. 그 당시 8, 10살이었던 나와 누나만이 홀로 남겨졌다. 이후 외할머니 집, 온성 고아원, 돌격대, 장사 등... 살기 위해, 살아 남기위해 정말 이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이제 를 위해 살고 싶다는 꿈을 꾼 순간 북한은 더 이상 내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나는 1988년 함경북도 김책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 안전원(경찰)이셨기 때문에 우리 동네에서 티비를 제일 먼저 가지고 있었을 만큼 생활이 괜찮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8, 우리 누나가 10살이 되던 해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골동품을 밀수하는 사람을 도와주다가 발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정말 운이 안 좋게도 그 당시 시범사례로 걸렸기 때문에 아버지는 안전원직에서 해제 당하고, 당에서 출당되어 일반 직장 혁명화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말이 혁명화지 단계별로 직급을 떨어뜨린 다음 구금시설로 끌고 가기 위한 하나의 절차였습니다. 북한에서는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데, 모든 명예가 김일성과 연결되어 있으니, 명예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처벌을 가하지 않고, 일단 해직 시킨 뒤 처벌을 가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한창 직장 혁명화로 강도 높은 노동을 이어가던 어느 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직장 동료들이 어떤 차가 와 아버지를 태우고 갔다는 소식을 어머니께 전해줬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정치범수용소로 가신 것을 의미했으며, 어머니께서는 이 말을 듣자마자 바로 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 가셨습니다. 정치범들에게는 연좌제를 적용해서 가족들까지 함께 수용소로 끌고 들어가기에 어머니는 우리가 수용소에서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느니 차라리 고아로 자라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와 누나는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8, 10살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쌀이 있어도 밥 할 줄을 몰라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만 있었습니다. 그렇게 몇 일을 있으니 동네 이웃들이 우리에게 빵 같은 거 몇 개를 쥐어 주고 집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 둘씩 가져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는 티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빵이 중요하고, 먹거리가 중요했으니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가 곧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누나하고 그렇게 계속 집에만 있었습니다. 학교에도 안 나가고 있으니 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지만, 그뿐이었습니다. 애들 둘이서 집에만 있으니 집은 거의 난장판에다 쓰레기 더미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난장판 속에서 10원을 발견했습니다. 10원이면 빵 2개를 사먹을 수 있는 돈이어서 누나와 저는 너무 신이 났습니다. 누나의 손에 이끌려 30분을 걸어 장마당으로 갔습니다. 드디어 장마당에 도착해 빵 2개를 사서 누나가 야 빵 조심해야되하면서 빵을 건내 주었습니다. 그 당시 장마당에는 꽃제비들이 정말 많아서 음식을 파는 사람들도 매대 위에다 고무를 덮어놓을 정도였습니다. “알았어하고 빵을 입에다가 딱 놓는데 바로 꽃제비가 빼앗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누나가 바보야하는데 누나 것도 쏙 빼앗아 갔습니다. 그 기억이 지금도 가슴 아프게 남아있습니다. 이후 종종 배가 고파서 장마당에 나갔습니다. 그때는 아직 훔쳐 먹는 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떨어져 있는 음식들을 주워서 먹었습니다. 주워서 먹는 다는 것이 어린 나이에도 부끄러웠습니다. 한 번은 누나가 먹태 대가리를 주어서 나한테 주었는데, 그걸 뼈까지 다 씹어서 먹은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두 달 정도 버티다 보니, 이제 집에 남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웃들은 우리에게 니네 이렇게 있다가는 죽는 다면서 할머니네 집에 가라고 기차를 태워줬습니다. 할머니는 함경북도 온성에 사셨고,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도 전혀 알지 못하셨습니다. 전화가 안 되니까 우편으로 해야 되는데 우리가 편지를 쓸 상황도 아니고... 일단은 자리만 잡아서 짐을 안고 기차에 탔습니다. 어린마음에 할머니 집에 가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 기차간다~’ 하면서 소리지르고, 이야기하면서 창문을 보다가 스르륵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기차간에도 꽃제비들이 너무 많아서 어른들도 자기 배낭을 끌어안고 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칼로 다 긁어서 물건들을 빼앗아 가는 형편인데, 우리는 신발도 벗고 아예 짐을 다 옆에다 놓고 잤으니... 기차가 한 중간쯤 갔을 때쯤 일어나 보니깐 속옷만 빼고 옷과 짐들을 모두 빼앗긴 후였습니다. 누나하고 나는 계속 울기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아 시끄럽다 조용히 해라!”고 소리치고, 북한 기차에는 열차 안에 경찰이 있는데, 우리보고 왜 꽃제비들이 기차를 탔냐면서 우리를 봉강역에서 강제로 내리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 내렸던 20년 전의 봉강역이 눈 앞에 선합니다. 봉강역에서 기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계속 울었습니다.(계속)

 

 

떠나는 기차를 보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남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