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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김부자의 건강연구소 - 1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7-05-22 10:5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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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

김부자의 건강연구소

 

증언자: 김형수<만청산연구소 연구원>

2009년 탈북, 2009년 한국 입국 

 

나는 1964년 양강도 혜산에서 태어나, 대학부터 평양에서 살다 6년간 만청산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대대로 교육자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났는데, 한국의 경우는 교수라고 하면 대단한데, 북한에서는 교수나 일반 노동자가 생활수준이나 사회적 지위가 거의 비슷하다. 월급자체가 별로 높지가 않아서 오죽하면, 북한에서는 박사를 죽만 먹는다고 죽박사라고 불렀다. 그래도 북한에서 공부하겠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나도 그 중의 한 명이었고, 학창시절까지는 북한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김부자의 건강연구소에 다니며 허상을 깨닫게 되었다.

 

 

학창시절


나는 혜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80년도에 진행한 전국 수학대회에서는 3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성적이 좋게 나오니 김일성종합대학만 바라보았고,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북한은 당에서 각 학교당 김일성종학대학에 몇 명을 배치하는 지시가 내려오는데, 우리 학교에는 9명이 내려왔다. 우리 학교에는 도당 책임자 리수만의 아들 리무송 등 고위층 자제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성적은 1등이었지만 김일성종합대학 입학자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교수 집안이었지만, 북한에서 교수와 당 간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어머니도 행정 간부였지만, 당 간부 자식들과는 대결도 안 되었다. 결국 나는 차선책으로 라진 해운대학에 입학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쩔 수 없이 라진 해운대학에 가려고 하니 화가 나서 혼자서 많이 울었다. 난 왜 저런 부모를 만나서 이렇게 차별을 받나 부모님도 많이 원망했다. 이런 나 같은 애들이 북한에는 많다. 우리 동네 살던 여성도 토대가 좋지 않아서 평양의대에 못 가게 되니, 자살까지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 때문에 한참 울고 집에 돌아왔더니 중앙당에서 전국 3등까지는 대학시험을 칠 수 있는 기회를 주라는 지시가 내려 왔다는 것이다. 너무 기뻐서 정신없이 시험을 치기 위해 평양으로 올라갔다. 시험은 혁명역사, 영어, 수학, 물리, 화학, 체육 등 6과목을 며칠에 걸쳐서 치고 집에 오니 입학 통지서가 도착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존경하는 김일성 장군님의 배려로 김일성 종합대학에 가는 시험을 칠 수 있었고, 내가 김일성종학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북한만한 나라가 없고, 당의 은혜가 하늘과 같이 크다고 생각했다. 내가 대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교복, 교과서, 선물 등 모두 공짜로 주고, 장학금도 주었다. 아버지 교수 월급이 70원이었는데, 장학금 이외에 매달 20원을 더 받았다. 7원 50전 정도면 일체 모든 한 달 식비가 다 해결되었기 때문에 넉넉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다. 

생명공학을 배우다

 

북한의 대학교는 5년제이고, 10년 동안 군대를 다녀온 학생들은 1년 동안 예비과를 다닌 다음에 본과로 들어간다. 본과에 입학하게 되면서 자기 학부와 학과를 결정할 수 있다. 자기가 먼저 선택하고, 학교에서 심사를 해서 최종결정이 된다. 나는 처음부터 생물학부를 지원했다. 어머니는 법과에 가서 나중에 검사가 되길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 앞으로 세상이 달라진다고 이과를 택하라고 하셨다. 마침 김일성이 제6차 당대회에서 생명공학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그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또한 김일성이 생물계통 박사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수문용이라고 공표하면서 사회적으로 수문용을 따라가자는 운동이 퍼져있었다. 북한은 1978년도에 자동화학, 생물화학을 발전시키려고 방침을 내릴 정도로 그 당시에는 선진적이었다. 나 역시 이 운동에 고무되어 생명공학에 진학한 것이다. 

 

 

만청산연구원에 배치 받다

 

대학교를 졸업 한 후, 만청산연구원에 배치 받았다. 만청산연구원은 호위과학 연구를 하는 곳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일가의 건강장수와 관련된 연구를 ‘호위과학연구’라고 부르며 여기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을 ‘호위과학전사’라고 불렀다. 만청산연구원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신원동의 봉화진료소와 마주하고 있는 만청산연구원은 높이가 2.5m인 시멘트담장 위로 전기철조망이 둘러 막혀 있다. 그것마저 안심치 않아 호위사령부 군인들이 24시간 무장보초를 서는 특수연구기관이다. 만청산연구원이라는 명칭은 김일성의 ‘만수무강’과 김정일의 ‘영원한 청춘’을 위한다는 데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에서 나는 6년간 근무했다.

 

만청산연구소의 역사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 하면, 연구소의 초대 연구기관인 기초과학원을 김정일의 지시로 하룻밤사이에 중앙당 재정경리부에서 빼앗긴 주석궁전(금수산의사당)경리부장 신상균은 김일성이 65살이 되던 1987년에 만청산연구원을 설립했다. 신상균은 기초과학원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연구 실적이 가장 높은 연구기관으로 성장시킬 야심으로 만청산연구원의 물적·인적 성장에 전력을 다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생물학부에는 갓 신설된 실험생물학과 전공반 졸업생들이 1기 졸업을 앞둔 시기였다. 생물학부에서는 1978년에 동물학과와 식물학과, 농업생물학과, 토양학과 외에 최첨단 생물학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실험생물학과를 개설하였고, 1985년부터 1기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세포공학과 유전자공학, 미생물공학을 비롯한 최첨단 생물학분야의 연구수법을 김부자의 건강장수에 도입하려는 야심이 드디어 만청산연구원 신설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