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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18호 관리소에서 28년간의 삶 - 4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6-10-26 10:53:05
조회수 :
5191


 

 

 공개총살

 

이주민들은 보위원에게 도대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끌려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절대로 묻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것을 물어보면, 어디서 반항하려는 것이냐며 바로 죽여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난 부모 따라 이유도 모르고 잡혀왔고, 내 부모가 죽은 지 오래 됐는데도, 어째서 해제가 안 됩니까?” 하고 물어본다면,“ 지금 관리소 규정을 반신반의 하는 거냐?”면서넌 무조건 총살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총살을 안 하면 이주민 관리를 하지 못한다고 겁을 주곤 했다. 돌아가신 내 어머니도 왜 18호에 들어갔는지 모르셨다.

1997년 심화조 사건(심화조 사건 : 김일성 사망 이후인 1997년 북한 고위급 관리 2만 명이 숙청된 사건) 때는 김정일 반대파들이 많이 죽임을 당하고 18호 관리소로 끌려왔는데, 그 때는 정말 굉장했다. 강원도당 책임비서 등 수많은 사람들이 비공개로 총살을 당하거나 탄광소로 보내졌다. 인간이 인간 취급을 당하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관리소로 끌려오다 보니 사람들은 넘쳐나고 살 곳은 없었다. 내 집에까지 다 왔다. 그 사람들이 들어온 후로는 관리소 분위기가 살벌해져서 사는 것이 끔찍했다. 총살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총살을 집행할 때는공개공판이라고 그 전날 써놓는다. 공개총살과 교수형은 공장 옆에서 집행하는데, 14호 관리소 보위부 사람들까지 다 건너와서 본다. 총살은 밖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미 반 쯤 죽여 놓은 산송장 같은 사람을 질질 끌어다 세워 총살했다. 일 년에 몇 백 번쯤 총살이 있었던 것 같다. 옆의 14호 관리소 지역으로 넘어가서 강냉이 가루 같은 것을 훔쳐 먹다가 붙잡히면 대부분 죽였고, 심화조 사건 때도 많이 죽였다. 미신 같은 것을 믿은 죄로도 많이 죽였다. 내 친구 어머니는 53세였는데 미신을 믿었다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은 의무적으로 보도록 되어 있다.

 

 

관리소에서의 해제

 

나와 내 가족들은 2001216, 18호 관리소에서 해제(해제 : 풀려나다)를 받았다. 하지만 여동생 둘과 남동생 하나는 아직 풀려나지 못했다. 이주민들이 해제되는 날은 주로, 216(북한의 민족최대의 명절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인데, 216일은 김정일의 생일이다), 415(415일은 김일성의 생일이다), 노동당 창건 50(1010일은 조선조동당 창건 기념일이다. 이 날은 19451010일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을 창당한 것을 기념하는 날로 법정 공휴일이다) 같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우리와 함께 해제 받았던 사람들이 총 일곱 가정이었다. 해제 받는 날에는 이주민들을 모아 놓고 해제 받는 사람들을 앞에 앉힌 다음, 간부들도 앉고너네 일을 잘하면 이주민들도 해제시켜준다라고 선전한다. 부럽게 바라보던 수많은 다른 이주민들은 해제민들이 군중들 사이로 빠져나갈 때, 꽃잎을 뿌리며 축하해준다. 해제된 후에는 18호 관리소에 있었다거나 듣고 본 것을 일체 입 밖에 내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온다. 관리소에서는 해제민 구역이라는 또 다른 지역에서 살도록 집을 지정해주지만, 원하면 다른 지역으로 갈 수도 있고, 장사도 할 수 있다.

내가 해제된 후, 안전부에 우리 친척들에 대해 물어봐서 이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 큰 아버지를 찾고 나서야 내가 왜 28년 동안 관리소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큰아버지 말로는 아주 오래 전 할아버지가 월남했던 것 때문이라는데, 장남인 그조차 그러한 사실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친할머니를 우리 아버지가 모시고 있었기 때문에 죄 없는 우리 가족들까지 모두 관리소로 잡혀간 것이었다. 만약 할머니가 큰아버지와 살았다면 큰아버지 가족들이 관리소로 끌려갔을 일이지만, 큰아버지는 농촌 여자를 만나 따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한국 와서 국정원에서 두 달 조사받을 때 할아버지 이름을 댔지만, 아직까지는 마땅한 소식이 없다.

해제를 받고 난 이후, 내가 살 마땅한 곳은 없었고, 장사라도 해 볼 밑천도 없었다. 그러다가 2002년에 평성에서 동무를 만나 순천에 있는 한 집을 소개받았다. 집주인은 할머니였는데, 60만원에 집을 팔고 싶어 했다. 돈을 모두 모을 때까지는 그 할머니와 한 집에서 살기로 하고 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을 맡겨놓고 청진으로 장사를 갔다 왔는데 이미 집이 홍수로 떠내려간 뒤였다. 12살 딸과 9살 아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잃고 시신조차 못 찾았다. 그 뒤로는 내 옆으로 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모두 다 마치 죽은 내 아이들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