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자료

[증언] 지상낙원 탈출기 ⑧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20-09-16 13:54:58
조회수 :
22

지상낙원 탈출기 ⑧

 

 증언자: 이태경

2007년 탈북, 2009년 한국 입국 

<북송피해자가족협회 회장>

삽화: 안충국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재학>



북한 정부, 일본 정부, 일본 적십자, 조총련, 한국 정부의 역사적 소용돌이 안에서 북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북송 재일교포들. 이태경님도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태어나 북한으로 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조총련이 그렇게 설파했던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은 자유 하나 없는 곳이었고, 한 평생 탈북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다는 이태경님. 탈북에 성공해 현재는 한국에서 북송피해가족협회 회장으로 북송 재일교포들의 실상을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믿었던 가족의 배신

 

‘이런 사람들을 친척이라며 50여 년의 세월을 그리워했던가’나의 아버님은 언제든지 고향에 가고 싶다고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족보를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 고향은 눈 감고도 누에 실 뽑듯이 암기하고 있었고 후에 사촌 형을 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다음부터 안창수의 행동은 갑을 관계에서 노예와 주인의 관계로 돌변했습니다. “안 선생님. 내가 한국에 가서 꼭 갚을 테니 빨리 보내주십시오.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한 달이나 독방에 갇혀 있으니 미라가 되는 것만 같았습니다. 온 몸이 타들어 가고 가슴마저 마르고 의식마저 말라 들어 순간순간의 발광을 겨우 참았습니다. “좋아. 그럼 3일 있다가 곤명으로 갑시다. 그런데 북경 역 검열에서 걸리면 난 모르겠수다. 혼자서 처리해야 하오. 그런 줄 알고 갑시다.” 두 달이 되니 조심성보다 조바심에 더욱 참기 어려웠습니다. ‘어차피 떠난 길, 빨리 가자’라고 마음이 앞섰습니다. 더욱이 날을 따라 심해지는 안창수의 멸시와 하대가 몹시 나를 괴롭혔습니다. 

 

쿤밍으로 가는 35시간 동안 줄 곳 침대에서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검열에 들기만 하면 꼼짝 없이 북송이 될 것이고, 이는 나의 죽음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쿤밍역에서 다시 버스로 한참 만에 자그마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며칠 뒤 다시 버스를 타고 중국 미얀마 국경 지대로 갔습니다. 여기서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행군에 필요한 운동화를 준비했습니다. 조금 있으니 양팔과 목의 검은 피부에 퍼런 문신이 그려져 있는 마른 체구에 인상 좋은 브로커가 왔습니다. 안창수와 더 내라, 덜 내겠다 하면서 한참 실랑이를 벌이더니 결국 나의 탈북이 결정되었습니다. 안창수가 나에게 악수를 청하였으나, 나는 그를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총알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야간 행군과 쇄골 골절, 번뇌, 고민, 인간 이하의 멸시가 한꺼번에 가슴을 때렸습니다. 

 

 

미얀마에서 드디어 한국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고불고불한 산길을 지나 미얀마 변방 산길에서 다시 2인용 트럭에 갈아타고 어느 작은 마을 여관에 도착했습니다. 아프리카 노예 상인 양 돈이 릴레이를 할 때마다 나는 여기저기로 넘겨졌습니다. 아카족, 샨족을 비롯한 원주민들과는 생김새와 피부색이 너무나도 달라 미얀마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도저히 외박이 불가능했습니다. 이래저래 안내를 받으며 태국으로 가던 중 미얀마 경찰에 체포되어 불법 입국 죄목으로 3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나는 도둑도 마약범도 아니며 더욱이 살인범도 아니다. 독재체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나서 자란 고향으로 가기 위해 탈북한 망명자이며 귀환자이다. 나는 돌아가면 죽는다. 국제법에 의하면 정치적 망명자는 의사에 따라 요구하는 국가로 보내주게 되어 있지않는가?. 빨리 보내주기를 청원한다.’ 항의하였으나 미얀마에서 3년이라는 수용소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압록강을 도강하는 순간부터 대한민국에 입국할 때까지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심장의 고동이 멈추는 순간과 온몸이 경련으로 굳어지는 순간들, 학대와 번민, 희망과 절망, 이러한 순간순간들을 합치면 온 몸이 졸아들고 피가 말랐으련만 46년간의 자유와 민주의 갈망이 너무나도 소중했기에 기어이 대한민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조선족 청년 김성국씨가 나를 찾아 준다면 꼭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매월 생활필수품을 수용소에 영치해 주신 미얀마 대한민국 대사관 영사님께 이 기회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3만 명의 탈북 시대에 3만 개의 탈북 유형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탈북은 나의 탈북 경로와는 비할 바 없는 삶과 죽음의 행적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더 많은 죽음과 시체들이 쌓여야 북한 국민들과 재일북송 교포와 북송 일본인들의 진정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도 일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체험한 재일북송 교포들과 북송 일본인들은 식어가는 인생의 마지막 숨을 가다듬고 가늘어지는 희망의 빛에 미래를 걸어 놓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항상 내일 걱정, 한 달 지나면 다음 달 걱정, 일 년 지나면 다음 해 걱정, 걱정이 없는 날이 없었습니다. 입을 걱정, 먹을 걱정, 절전, 쌀, 물 걱정, 자식 걱정, 집 걱정, 부모 걱정, 걱정, 걱정, 걱정을 매일 달고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의 나는 북한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본여행과 고향 방문을 했으며 여의도 벚꽃 구경, 경주 유채꽃 구경, 열린 음악회 관람 등 흥겨운 놀이 장에서 바삐 지내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한갓 철도 노동자로, 북송교포 자식으로 탄압받고 멸시받던 우리 아들과 딸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회사에서 떳떳하고 보람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끝). 

 

 

한국에서 희망찬 생활을 시작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