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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지상낙원 탈출기 ⑥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20-05-25 14: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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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낙원 탈출기 ⑥

 

 

증언자: 이태경

2007년 탈북, 2009년 한국 입국 

<북송피해자가족협회 회장>

삽화: 안충국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재학>

 

 

북한 정부, 일본 정부, 일본 적십자, 조총련, 한국 정부의 역사적 소용돌이 안에서 북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북송 재일교포들. 이태경님도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태어나 북한으로 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조총련이 그렇게 설파했던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은 자유 하나 없는 곳이었고, 한 평생 탈북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다는 이태경님. 탈북에 성공해 현재는 한국에서 북송피해가족협회 회장으로 북송 재일교포들의 실상을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쑹장허에 도착하다

 

우리는 혜산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건너편 중국의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세 개의 초소를 지나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철이야. 이게 그 첫 번째 초소인 모양이다. 이 밑의 강물로 돌아서 최대한 안전하게 가자.” 말이 떨어지자 아들은 오른쪽 가시덤불을 헤쳤습니다. 다행히도 요란하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가 우리의 나뭇가지 헤치는 소리와 발자국 소리를 삼켰습니다. 웅덩이에 빠지고 돌에 미끄러지며 잡았던 나뭇가지의 가시가 손바닥에 박혀도 아픔을 몰랐습니다. 물 폭이 더 넓어지고 요란한 폭포 소리에 앞을 겨우 분간해 보니 강을 막은 담이 나타났습니다.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어 방향을 바꾸어 왼쪽 길 위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서 나세히 보니 강을 막아 전기를 생산하는 작은 발전소였습니다. 다시 걷고 있는데, “아버지, 숨자요. 차가 와요” 왼쪽 절벽 위의 작은 나무에 몸을 숨겼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차를 보내고, 길 위에서 내려오려는데 지팡이가 허공을 짚으며 몸이 날라가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왼쪽 목이 ‘툭-’하며 시큰함과 함께 쇄골이 아파왔습니다. 아픔과 함께 오기도 생겼습니다. ‘가야 할 길이 아직 먼데 여기서 봉변을 당하다니. 목이 부러지고, 뼈가 부서진다해도 꼭 목적을 성취하리라. 내가 약하면 아들도 약해진다. 꼭 탈북에 성공해야 한다.’이런 마음으로 5일째 걷고 있는데, 어둡고 침침한 산속에서 저 멀리 음악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앞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긴장감이 확 밀려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행군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며, 브로커를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남루한 행색을 감추기 위해 북한에서부터 준비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일본제 격자 양복, 미국제 벨트, 중국제 구두, 일본제 배낭, 누가 봐도 탈북자라는 행색은 아니었습니다.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재빠르게 올라가 돈 100원을 내밀었습니다. 운전수는 뚱뚱한 체격에 유순하게 생긴 인상 좋은 중국인이었습니다. 조선에서 친척을 찾아 왔는데 강물에 빠지면서 주소가 없어졌다는 말을 눈짓, 손짓으로 하며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운전수는 여기서 조금만 가면 공안이 지키고 있어서 어렵다며 난처해했지만, 억지로 100원을 손에 꼭 쥐어주며 애걸했습니다. 그 손에서 돈이 빠져나오면 나의 절실한 소원이 빠져나오는 것만 같아 손을 펴지 못하게 꼭 감싸 쥐었습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우리들의 행색을 훑어보고는 결심한 듯 조금 기다리라고 하고는 꽤 큰 오토바이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마을 입구를 조금 벗어나 차단봉이 늘어선 초소에서 속도를 줄여 지인인듯한 공안과 대충 손 인사를 했습니다. 초소를 지나는 순간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나의 목덜미를 확 잡아 내치는 것 같아 잔등이 오싹했습니다. 초소를 통과하여 쑹장허(松江河)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교회를 통한 한국행의 좌절

 

쑹장허에서 사람들을 만나 조금이라도 비위를 상하지 않게 인사를 깍듯이 하고는 말을 했습니다.‘우리는 조선에서 온 사람입니다. 혹시 조선 사람이 없습니까?”,“쁘싱, 쁘싱” (몰라! 몰라!) 단번에 거절당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언제 어떻게 찾을지 막막했습니다. 일단 마을로 들어가서 어느 집이든 조선말을 아는 사람부터 찾아야 했습니다. 이집 저집 마을을 한 바퀴 돌아 60대 자그마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할머니, 우리는 조선에서 왔는데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나요?”라고 조선말로 물어보자, “응? 조선에서 왔군요! 어떻게 왔지요? 들어오세요.”라고 우리를 반기는 할머니의 따뜻한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랜만에 인간미 넘치는 물을 먹으니 온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습니다. 할머니는 우리의 처지를 듣더니 조선 사람이 모이는 구역 예배에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말이 너무 반가웠고 조선인이라는, 한 민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었습니다. 

 

우리는 할머니의 도움으로 대여섯 명이 모여 있는 전도사의 집으로 갔습니다. 우리의 방문 소식을 듣고 전도사님이 먼저 나와 반겨 주었습니다. 나는 일본이든 한국이든 갈 수 있게 제발 도와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부탁에 그는 **교회에서 도와 줄 것 같다며 남편은 장로이며 아내는 권사라는 인심 좋은 **교회로 우리를 보냈습니다. 여기서 또 탈북하려고 하며 한국에 있는 친척을 찾아 가려는데 도와 달라고 말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애원이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연길로 가서 브로커를 찾는 편이 훨씬 쉬울 것이라 해서 연길로 갔지만, 찾아간 교회마다 문전박대를 당했습니다. “여기는 탈북자를 도와주는 곳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단호하고 냉정한 태도에 저는 아연질색했습니다. 북한에서 밤에 이불을 쓰고 몰래 듣던 한국 방송에 의하면 거의 모든 탈북자들이 교회를 통해서 탈북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교회만 찾으면 한국으로 보내주는 줄로만 알았는데...(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