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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지상낙원 탈출기 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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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 :
2020-02-04 14: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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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낙원 탈출기 ④

 

 

                                       증언자: 이태경

                                              2007년 탈북, 2009년 한국 입국 

                                              <북송피해자가족협회 회장>

       삽화: 안충국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재학>

 

 

북한 정부, 일본 정부, 일본 적십자, 조총련, 한국 정부의 역사적 소용돌이 안에서 북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북송 재일교포들. 이태경님도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태어나 북한으로 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조총련이 그렇게 설파했던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은 자유 하나 없는 곳이었고, 한 평생 탈북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다는 이태경님. 탈북에 성공해 현재는 한국에서 북송피해가족협회 회장으로 북송 재일교포들의 실상을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아들과 함께 탈북을 결심하다

 

탈북을 결심하고 17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일본이 확실히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내 고향이니 알고 있어. 한국도 대통령에게 주먹질과 집회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들었어. 그러니 일본에 가든지 한국으로 가든지 자유와 희망을 찾아 탈북하자. 위험 할 수도 있어. 그래 너의 결심은 어떻니?” 고등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도 못하고 있던 아들은 큼직한 눈을 번쩍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버지. 이렇게 살 바엔 탈북하다가 죽는 게 낫지요. 갑시다. 자유를 찾아 희망을 찾아갑시다.” 나는 아들이 목숨을 잃을 각오로 탈북에 선 듯 응해 준 데 대해 고마웠습니다. 또 말도 못하고 떠나는 아내와 딸에게 너무나도 미안했습니다. 생사의 위험한 길을 어서 가라고 떠밀어 보내는 아내와 딸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돈을 벌러 혜산에 간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떠나기 몇 달 전에 누님과 형님에게 탈북 결심을 이야기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태경아! 그 위험한 길을 어서 가라고는 못하겠다. 말리지도 않겠다. 조금 젊었으면 내가 가고 싶은 길이었으니까. 내가 부탁 할 것은 조심해라. 실패하면 너는 물론 온 가족이 반역자의 집안이 된다. 그러니 조심해라, 그리고 성공해서 꼭 살아 있다는 연락을 해라.” 이것이 누님과 형님과의 마지막 말이 될 지는 몰랐습니다. 2007년 9월, 아들과 나는 혜산 시장에서 탈북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입했습니다. 5일 동안의 식량으로 빵과 분유, 숙영할 수 있는 하우스, 자살과 방어용 즉 죽고 죽일 수 있는 나이프, 나침반, 쌍안경 등... 북한에서 지도는 통제품이므로 도서관에서 김일성의 혁명 활동 지도를 대출하여 장백지역을 복사했습니다. 저는 단지 멀리, 저 멀리로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강을 넘다

 

혜산시 삼봉동을 거쳐 보천읍까지 압록강 연선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보천군 화전리의 깊숙한 곳이 도강의 적지였습니다. 12시. 보천군 화전리를 도착한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다시는 먹어 보지 못할 조선의 쌀밥과 양파를 넣은 돼지고기 볶음이었습니다. 갑자기 목구멍이 메었습니다. 곰팡이 냄새가 나고 시커먼 쌀이지만 46년 동안 나의 생명을 유지해 오던 잊지 못할 마지막 도시락이었습니다. 다 먹지 못하고 혹여 꽃제비가 지나가다가 먹을 수 있게 철로 위에 놓아두었습니다.

 

좌우 50미터 거리 봉우리에 초소 두 개가 보였습니다. 만일 잡힌다면 재일 북송 교포이며 황해도에서 온 나를 국경 연선 지구의 그들과는 달리 수용소로 보낼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10미터 아래에는 압록강이 있었습니다. 심장이 쿵당 거리며 당장 뒷덜미를 잡아 당기는 것처럼 뒷목이 뜨거워졌습니다. “하나, 둘, 셋” 우리는 동시에 물에 들어섰습니다. 마음은 저 멀리로 달리는데 발은 깁스를 한 것 같이 뻣뻣해졌습니다. ‘빨리 가야 한다. 빨리.’ 다행히 경비대는 곤히 잠들었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강변에 오르니 애들 셋이 이쪽을 보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40미터 거리에 25초밖에 걸리지 않는 심장을 조이는 순간에 평화로운 애들의 배웅을 받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편해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새 없이 다시 달음질을 쳤습니다. 앞에는 자갈을 치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얼마나 많은 탈북자들을 보았는지 허겁지겁 달려오는 우리를 보고도 아랑곳없이 수걱수걱 고된 삽질만 하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사람이 없는 산으로 향했습니다. 중간에 오르니 녹이 쓴 쇳덩이를 목구멍에 매달아 놓은 듯 쇠 비린내에 잠시 주저앉고 천식에 걸린 환자처럼 기침을 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누구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야. 이젠 좀 천천히 가자. 따라 오는 사람이 없구나.” 숨을 고르며 산중턱에서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제일 위험한 고비는 넘겼기에 한숨을 쉬는데 갑자기 눈물이 울컥하고 나왔습니다. 탈북을 결심한 26년 전, 나의 절친 진성이 그토록 바라던 탈북을 단 20분의 짧은 시간에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바보 같은 지난날이 얼마나 허무한지 허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독재의 땅에서 자유의 땅을 밟았다는 성취감에 기뻤고 지난날이 어이없어서 울었습니다. 나서 자란 고향은 아니지만 미운 인연도 인연인지라 북한 땅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했습니다(계속). 

 

 

탈북하기 전 압록강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