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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지상낙원 탈출기 ②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9-09-23 15:3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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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낙원 탈출기 ②

 

 

                                       증언자: 이태경

                                              2007년 탈북, 2009년 한국 입국 

                                              <북송피해자가족협회 회장>

       삽화: 안충국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재학>



북한 정부, 일본 정부, 일본 적십자, 조총련, 한국 정부의 역사적 소용돌이 안에서 북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북송 재일교포들. 이태경님도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태어나 북한으로 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조총련이 그렇게 설파했던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은 자유 하나 없는 곳이었고, 한 평생 탈북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다는 이태경님. 탈북에 성공해 현재는 한국에서 북송피해가족협회 회장으로 북송 재일교포들의 실상을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북한에서 재일교포들의 탈북

 

북한에서는 숨죽여 살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지금은 탈북해서 한국에 사는 친구A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A는 북한에 조총련 단장으로 온 골수 사회주의자였습니다. 북한에 가면 마음대로 공부할 수 있고, 소련으로 유학 보내준다고 해서 결심하고 북한으로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연히 그렇게 되지 않았지요. 꿈을 철저하게 짓밟히고, 평생을 용해공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북한에서는 처음에 가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천대받고 압박받고 멸시받던 북송 재일교포를 같은 동포로서 넓은 조국의 품에 안겨 주셨다” 이렇게 선전합니다. 현실은 이렇게 아이러니합니다. 

 

현실이 이러하다 보니 많은 북송 재일교포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탈북하고 싶어 했습니다. 1960년대부터 탈북이 시작된 것이지요. 비록 모두 실패했지만 탈북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만큼 북한은 우리가 바라던 그런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북송재일교포들이 하도 탈북을 하니 북한 정부에서도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당은 어머니 품이다’ 하면서 조금 관용이 있었습니다. 탈북하다 잡히면 정치범 수용소로 안 가고 교양했어요. 교양이라는 것이 공산 대학이라는 곳에서 6개월 공부하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공부는 당 정책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부패하고 썩은 사회라는 것을 계속 주입시켰습니다. 그런데 1967년부터는 이런 관용이 없어졌습니다. 북한에 아주 대대적인 숙청이 일어나면서 사회는 더 험악해 졌습니다. 그때부터는 북송재일교포들도 가차 없이 잡아갔습니다. 탈북하려다가 잡혀간 사람, 말 잘못해서 잡혀간 사람 등 우리 친구들도 많이 잡혀갔어요. 그 친구들 중에 10대에 잡혀간 애들도 정말 많아요. 말 잘못했다는 것도 별말도 아니에요. 술 먹고 다른 사람들이 일본은 어떻냐? 물어보면, 일본은 자유롭다. 여기는 힘들다. 이런 말하면 반동으로 잡아가는 거예요.

 

 

불안한 마음

 

재일교포들끼리는 북한에서 동포사회를 만들어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누가 잡혀갔다 하면 소문이 쫙 나요. 어제 밤에 새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와서 데리고 갔다 하면서. 그러면 서로서로 조심하는 거죠. 여기서는 재판이니 그런 거 아무것도 없어요. 판사가 있고, 변호사가 있고 그런 거 하나도 없고, 그냥 보위부에서 서류 하나 만들어서 뚝 넣으면 끝이에요. 그럼 그 사람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거죠. 소문으로만 누가 잡혀갔대. 이렇게 아는 것입니다. 몇 년 형 받았대? 이런 질문도 없어요. 어디 갔냐? 이런 거 물어보면 같은 사람으로 취급돼서 불이익 당하니까 마음 편히 물어보지도 못합니다. 제가 한국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도 80년대 이전까지는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럼 저는 이렇게 말해요. 그래도 한국은 그 시기에 돌팔매질이라도 할 수 있었고, 시위라도 할 수 있지 않았냐고. 북한에 비하는 것 자체가 벌써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는 일단 말을 못해요. “아” 소리만 해도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가서 어떻게 됐는지 모르니까요. 잡혀가서 어떻게 됐는지 아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에 갔다가 나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북한 주민들도 다 그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오는 곳, 들어간 다음에 알아보지도 못하는 곳,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 불명의 장소. 그렇기 때문에 북한에 살면서 정치범이 되지 않으려면 정말 감정까지 통제를 당해야 합니다. 김일성이 죽고 추모기간이 있었습니다. 저 포함 모든 북한 주민이 참가 했는데 누가 빨간 립스틱을 발랐나봐요. 그랬더니 지금 위대한 수령님이 돌아가셨는데 무슨 기쁜 마음을 가지고 그 립스틱을 발랐는가 하며 보위부에 잡혀갔습니다. 이런 감정 하나까지도 다 감시하는 나라입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북한은 북송재일교포들을 모두 감시하고 탄압했습니다. 아무리 성분이 좋고, 조총련에서 간부를 했건, 일본의 친척들에게 막강한 지원을 받는 상공인이든 모두 탄압의 대상이었습니다. 조금만 잘못하거나 자기들 눈에 거슬리면 간첩으로 몰아 잡아갔습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에 북송재일교포들이 약 100명정도 살았는데, 거기서 15명 정도가 잡혀갔습니다. 15명 중 가장 많은 게 탈북하다 잡힌 사람, 한 7명 정도 되고, 말 잘못해서 잡힌 사람이 한 3-4명 됐습니다. 그 다음에 간첩으로 한 두어명 잡아갔고, 반동이라고 해서 전단지 뿌렸다고 한 명 잡아갔고. 이렇게 보게 되면 우리 동네 북송재일교포의 약 15%가 소리 소문 없이 잡혀가 지금까지 생사도 모릅니다. 아주 초기에 잠깐 말고는 꾸준히 계속 잡아갔습니다.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 들어가면서 잡아가는 것이 조금 줄어들었어요.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고난의 행군으로 북한 체제가 힘들었기 때문에 감시가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계속)

 

 

감시 속에서 항상 불안한 재일교포들의 눈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