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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지상낙원 탈출기 ①
작성자 :
최고관리자
작성일 :
2019-07-16 10: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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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낙원 탈출기 ① 

 

 

                                       증언자: 이태경

                                              2007년 탈북, 2009년 한국 입국 

                                              <북송피해자가족협회 회장>

       삽화: 안충국 <홍익대학교 미술학과 재학>

 

 

북한 정부, 일본 정부, 일본 적십자, 조총련, 한국 정부의 역사적 소용돌이 안에서 북한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북송 재일교포들. 이태경님도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태어나 북한으로 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조총련이 그렇게 설파했던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은 자유 하나 없는 곳이었고, 한 평생 탈북하기 위해 기회를 엿봤다는 이태경님. 탈북에 성공해 현재는 한국에서 북송피해가족협회 회장으로 북송 재일교포들의 실상을 알리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태어나다

 

저는 북송재일교포 1.5세입니다.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태어났고, 9살 때 부모님을 따라 북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북송되었는가는 크게 봐서 모든 북송 재일교포들과 다 같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은 배우기 위해서 갔고, 자신의 뼈를 조국에 묻겠다하고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조국이 아니지만은 말이에요. 또는 일본에서 생활난을 겪어서 잘 살아보려는 욕망으로 북한으로 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생활난이라는 거, 일본에서 살 당시에는 본인들이 극심한 생활난으로 고통 받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절대적으로 보면 북한보다 훨씬 좋은 생활이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정치 이런 거 하나도 모르는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알아요? 전혀 몰랐죠. 순전히 선전에 속아서 갔습니다. 그 당시 북한이 지상낙원이라고 조총련이 대단하게 선전했습니다. 무상치료, 무상교육, 배움의 길이 활짝 열렸다!, 마음대로 일하고, 마음대로 배우고, 집도 다 무상이다! 이러면서 굉장했습니다. 저도 그때 일본에서 조선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에 조총련 사람들이 와서 북한 건설하는 그런 내용의 영화들을 보여줬습니다. 그때가 1959년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북한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사회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일본 정부는 우리를 어디로든 보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말이 노력이지 나쁘게 말하면 음모와 책략을 꾸몄다.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네요. 그 당시 재일교포들 중에는 생활수급자가 많았습니다. 못 사니까. 실업자도 많았고요. 생활수급자가 많아서 일본 정부는 우리에게 주는 수급비를 아끼고 싶어 했습니다. 또 재일교포들이 치안유지에 걸림돌이 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북한으로 가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냥 속아서 북한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1960년도에 북송선을 탔습니다. 북송선이 처음 출발한 때가 1959년 12월 14일이니 정말 초기에 갔지요. 속아서 간 것도 문제이지만 더 문제는 우리가 가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재일교포들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은 대한민국입니다. 친척들도 한국에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북한으로 가게 된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서 저는 우리 아버지에게 한스러운 말을 많이 했었습니다.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갈 때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배에서 주던 도시락은 너무 역해서 먹기가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새까맣고 냄새가 나는지... 사과는 알이 작아서 어린 아이의 주먹보다도 작았습니다. 벌써 배에서부터 상쾌한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아 이거 이런걸, 기웃기웃하면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북한에 도착하니, 갑판 앞에 많은 환영인파가 몰려 있었습니다. 테이프 같은 것을 던지기도 하면서 환영해 주는데, 온통 새까만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다 찢어진 신발을 신고 있고, 육감을 자극하는 냄새가 확 풍겼습니다. 중앙당 무슨 간부라는 사람이 와서 축사를 해줬는데, 당연히 축사하는 사람은 그래도 북한에서 괜찮은 간부일 텐데, 모직으로 된 바지통이 넓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어린 눈에는 그게 그렇게 촌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환영인파를 지나 체코제 버스를 타고 가서 환영인사라며 식탁에 앉아 과자, 사탕, 과자와 같은 다과를 주었는데, 너무 맛이 없어 저와 동생은 사탕 한 알 먹지 못했습니다. 북한에 도착한 첫 날부터 속았구나... 바로 알았습니다. 

 

환영식 다음에는 청진 초대소라고 해서 아파트 숙소에 임시로 배치 받았습니다. 거기서 일주일 내지 15일 동안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큰 지도가 붙어 있었는데, 그 지도를 보면서 나는 여기 가겠다, 여기 가겠다, 하면서 북한의 간부들과 배치 받을 곳을 서로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일본에서 시모노세키, 제일 아래쪽에, 눈도 안 오는 그런 곳에 살았으니까 좀 따뜻한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간부가 북쪽의 회령으로 가라고 하니, 아버지가 우리는 못가겠다 말하셨습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한창 상의하시고, 다시 가셨습니다. 사실 우리가족은 당연히 평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결국 그 옆의 대동구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눈이 감기는 그런 상태라는 것입니다 배치도 당 마음대로 하고... 북한에서는 배움의 자유, 거주의 자유 같은 자유라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계속). 

 

 

청진항에 도착한 북송선